선생님, 많은 이들이 휴가를 떠나는 기간인데, 휴가 계획은 세우셨는지요? 먼 곳으로 떠나지 않으시더라도, 열심히 달려온 반년의 피로를 말끔히 풀고 쉼을 누리는 시간을 가지셨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여름휴가 못지않은 특별한 여행, 우리 아이들이 지금, 여기서 행복한 꿈을 꾸는 “뜻밖의 여행”이 될 등대지기학교도 기대하며 기다려주세요. 이제 6기 등대지기학교 1차 등록 마감일(7/31)이 얼마 남지 않았으니 기왕 등록을 생각하고 계시다면, 망설이지 마시고 7월 안으로 서두르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짧은 동영상 한 편을 첨부합니다. 1분여 가량의 짧은 동영상이니 보시고 생각나는 이웃이 있으시면 [FW]를 해주셔도 좋겠습니다. 영상의 내용은 등대지기학교를 졸업한 엄마를 둔 한 아이의 고백입니다. “학원에 다니기 싫다니까 이제 억지로 보내지 않으실 거래요. 너무 기뻐요.”라며 배시시 웃는 천진한 아이의 모습이 틀림없이 선생님의 마음도 따뜻하게 할 거라 생각합니다. 이런 변화들이 우리 안에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다는 깨달음이, 어쩔 수 없다며 체념했던 우리의 마음에 새로운 소망을 일으킬 것입니다.

 

 

2011.7.22. 사교육걱정없는세상

 


등대지기학교신청합니다
신고

'국민이 길찾다' : 영어사교육 대책 연속 4회 국민 대토론회

* 길찾기 4
영어사교육 광풍: 시민은 무엇을 할 것인가

논찬: 정병오 (좋은교사운동 대표)



신고

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그 아이의 모습 속에서 나를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특별히 내가 정말 싫어하는 나의 모습, 그래서 애써 극복하려고 노력해서 이제는 사람들에게 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극복해냈던 모습을 아이에게서 볼 때 너무 화가 난다. 그래서 애써 감정을 누르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런 모습을 벗어나야만 하는 이유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지만, 사실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아이가 그런 연약성을 벗어버리고 참 자유함과 강함을 입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하심과 만져주심이 아니면 아이 자신의 힘쓰고 애씀으로는 되지 않음을. 그리고 어쩌면 그의 그 연약함은 그가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만 하는 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모임이나 기관의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의 연약함과 부딪힐 때가 있다. 특별히 그 자리에 있을만한 역량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음으로 인해, 자신은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일은 제대로 추진하지 못함으로 인해 여러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고 그 모임이 제대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자리와 그 자리에 있는 자신의 체면에 집착해 일을 그르치는 사람을 볼 때 분노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나는 그 사람을 너무도 잘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의 그런 모습이 너무도 내 눈에 잘 띄고, 한편으로 이해를 하면서 동시에 더 깊게 분노를 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과정 속에 있다

이전에는 선과 악이 분명히 구분되고, 이 세상에 선인과 악인이 따로 존재하는 줄 알았다. 물론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선과 악은 분명히 구분될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인간 안에서는 선 속에 악이 있고, 악 속에 선이 함께 있다. 우리가 선을 붙들고 악과 싸우지만 사실 우리 속에도 악이 같이 있고, 우리가 싸우는 그 악인 가운데도 일말의 선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아무리 선을 붙들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그 선을 악한 방법으로 휘두를 수도 있고, 그 선한 싸움의 유탄으로 악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인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악인과 싸울 때, 싸움의 편의를 위해 그 악인을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가지 모습으로 고정시켜놓고 싸운다. 내가 설정한 그 모습이 그 사람의 실체일 수도 있고, 좀 과장된 모습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렇게 고정시켜놓아야만 내 싸움의 정당성과 동기가 식지 않는다. 하지만 불행히도 상대방은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이다. 그는 내가 선의 이름으로 공격하는 그 공격을 받고 자신의 악을 고쳐나가는 경우가 많다. 동시에 나 역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 내가 상대방의 악과 싸우기 위해 마음을 강하게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나의 마음이 굳어버리고 그것이 또 하나의 우상이 되어 악하게 되어가는 경우가 많다.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대가 심연을 굽어볼 때,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본다.(Whoever fights monsters should see to it that in the process he does not become a monster. And when you look long into an abyss, the abyss also looks into you. BGE 146)”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쉬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과 연약성이 이렇게 복잡할진대 이러한 인간과 인간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도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그래서 많은 경우 하나님이 이 땅의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울부짖는 선인의 수고와 기도에 대해 쉽게 응답하지 않으시고, 악인의 번창을 허용하시고 선인은 오히려 오해를 받고 수치의 구덩이에 빠뜨리시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악인의 큰 악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면서 선인의 지극히 작은 실수에 엄격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분의 깊은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 분의 영광과 지혜의 빛을 약간이라도 맛보기만 한다면 그 분은 침묵하거나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라 슈퍼컴퓨터보다 훨씬 더 복잡한 하나님의 지혜 속에 60억 인구를 다 계산에 넣으시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처한 상황과 그 은밀한 마음까지 다 고려하시며, 각 사람의 향한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이루시고, 당신의 가장 선하시고 공의로우신 사랑을 펼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 분은 결코 침묵하거나 쉬지 않으시며, 한 가지 사건을 통해서도 60억 명에게 60억 가지 이상의 말씀을 하고 계시며, 그 복잡한 모든 얽히고설킨 선과 악의 문제를 풀어내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하나님의 이 광대하심과 지혜의 크심에 대한 깨달음은 결코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거나 불가지론에 빠지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비할 때 인간은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는 식의 모호함으로 우리를 빠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지각과 판단을 더 분명하게 해 준다. 다만 우리가 싸워야 할 악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해 준다. 이 땅 가운데 악인과 싸우고, 지도자의 연약함과 싸우고, 악한 구조와 싸울 때도 그 악하고 약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나를 통해 그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놓치지 않게 된다. 악을 향한 나의 싸움이 악을 멸할 뿐 아니라 그 악에 사로잡힌 자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도구임을 알게 된다. 그러하기에 악과 싸우면서도 악인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동시에 하나님은 악과 싸우는 그 상황을 통해서 나의 연약함과 악함을 다루는 일도 함께 하고 계심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기에 거대한 악 앞에서 너무도 작고 보잘 것 없으며 여전히 약함에 떠는 나로 인해 절망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도구로서 하나님을 의지해서 일하며, 사랑의 동기로 일하며, 그 싸움을 싸울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거룩해지며 더 여유로워지게 된다. 나를 향한 상대방의 공격과 모략으로 인해 마음이 약해지거나 분노에 침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지금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구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지혜에 이르도록

매일 매일 부딪히는 우리의 일상 뿐 아니라 가장 복잡하게 보이는 이 세상 모든 구조에 이르기까지 깊게 들어가 보면 결국 ‘인간’이 있고, 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은 ‘약함’과 ‘악함’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이 ‘약함’과 ‘악함’이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모든 인간과 사회의 문제와 고통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우리는 이로 인해 괴로워하고 또 때로 싸우며 살아간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본질일진대, 우리는 이 모든 인간의 ‘약함’과 ‘악함’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이르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지혜를 살아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고 불리울 것이다.

신고

“형! 형은 이렇게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버려가며 우리 시대 불의와 문제와 싸우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던지려고 하고 있는데, 이러한 형의 행동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지? 형으로 하여금 이러한 삶을 살게 하는 근거는 무엇이지?”

“그것은 ‘역사’야!”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대학 시절 비교적 친하게 지냈던 운동권 핵심 선배와의 대화의 한 구절이다. 물론 그 선배가 믿고 자기 행동의 근거로 삼고 있는 이 ‘역사’라는 것이 막연하게 긴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정의가 결국 승리한다는 낭만적인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설에 근거해서 자본주의 이후에 사회주의가 도래하는 것이 확실하고 이 사회주의의 도래를 앞당기는 것이 역사적 사명이라는 사회과학적 생각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아니면 이 두 가지 생각이 포함되어 있는 말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 상황에서 그 말의 의미를 더 자세하게 물을 필요가 없이 그도 나도 이 ‘역사’라는 단어 앞에서 이심전심의 마음을 가졌다.


역사의 배신, 사람의 변절

하지만 역사는 그 선배의 믿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역사가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드렸던 사람들의 믿음을 배신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우선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대한 믿음의 근거로 막연하게 붙들고 있었던 소련을 비롯한 동구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너무도 빠른 시간에 일시에 무너져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민주화가 진행되긴 했지만 그 진행방식은 민중이 주인이 되는 방식이 아닌 정치가들의 권력욕과 야합으로 얼룩진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민주화의 결과로 개인의 일상적인 자유와 인권의 진전이 있긴 했지만 더 많은 부분은 언론권력과 각종 힘있는 이해집단들의 힘을 실어주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들이 신뢰했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시대 변혁의 힘을 얻었지만 곧바로 작은 기득권으로 변해버렸고, 또 다른 민중인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화세력이 정권을 얻고 개혁의 명분을 수행하고 있지만, 이제 개혁이 아닌 빵을 요구하며 과거로 회귀하려는 백성들의 요구 앞에서 당황해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믿었던 사회주의, 노동자, 민주, 개혁이 절대신이 될 수 없고, 역사가 반드시 우직하게 정의의 길에 서는 자의 편에 서지 않고, 간사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역사의 물꼬를 비틀어놓은 자들의 물길을 따라 역류하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좌절했다. 그래서 민주화운동 출신 정치가들 중에도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사람들이 많았고(이중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변절’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일상적 시민의 삶으로 돌아간 이들 가운데도 부동산 파동과 주식 폭등, 사교육 팽창의 흐름을 주도하거나 이 흐름의 핵심에서 이익을 누리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물론 개개인의 삶이 다르기에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40-50대, 70-80년대 학번들의 한 단면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들이 대학 시절에 꿈꾸었던 것을 제대로 실현시키지 못하고 또 하나의 기득권 세대가 되어가는 원인에는 그들이 믿었던 ‘역사’에 대한 좌절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과연 사람이 희망인가?

민주화세대의 좌절과 실패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역사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그 시대의 불의와 싸우고 민중을 위해 자신을 드렸던 그 삶이 지극이 선하고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역사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심지어 그들 자신마저도 역사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원인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과연 역사의 본질 자체가 ‘배신’이고 역사가 결코 선의 편이 아닌데 그들이 잘못 이해하고 짝사랑했던 탓일까? 아니면 그들의 믿음에 또 다른 오류가 있었을까?

최근에 드는 생각은 민주화 세대가 품었던 ‘역사’에 대한 믿음의 이면에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진정으로 믿었던 것은 ‘역사’가 아니고, ‘사람, 혹은 사람의 선한 의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을 배신했던 것도 ‘역사’가 아닌 그들이 믿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들을 배신한 것은 그들이 믿고 신뢰했던 공산국가의 지도자들, 민주화에 앞장섰던 정치인, 노동자 농민, 시민이었고, 나아가 그들과 함께 운동을 했던 동지들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자신을 배반하는 단계로 나아간 경우도 많을 것이다.

결국 사람의 약함과 악함에 대한 처절한 인식의 부재와 역사에 있어서 사람이 차지하는 역할과 한계에 대한 고민의 철저하지 못함, 그리고 역사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오만이 역사의 좌절을 맛보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역사, 사람을 다루시는 그 분의 손길

사실 나는 대학 시절에는 역사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고 그 분이 가장 선하고 공의롭게 역사를 진행한다는 사실을 관념의 세계에서는 인정했지만 현실에서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역사를 신뢰하던 그 사람들이 역사의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고, 심지어 그들 가운데 일부가 역사의 걸림돌이 되는 현상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정의가 실현되되, 완벽한 의가 아닌 상처와 모순을 가진 형태로 의가 실현되고, 또 다른 과제를 남기는 방식으로 역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역사를 운행해 가시는 그 분의 깊이와 오묘함을 약간은 느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역사는 매우 복잡한 기계와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어떤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선과 악의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인격체인 인간들이 만나서 만들어가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 운행은 기계적인 선과 악에 대한 심판이 아닌 열길 물속보다 깊고 복잡하며 변화무쌍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선악과 탐욕, 사랑과 미움, 자기애와 권력욕, 구조악과 집단이기주의 등의 문제를 다루어가는 것이다. 그 분은 이 가운데서 악을 제어하고, 이 세상을 보존하시며, 낮은 자를 높이시고, 높은 자를 낮추시는 일을 하고 계신 것이다. 무엇보다 타락한 인간 세상과 역사의 한 가운데 아들을 사람의 형상으로 보내시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기 백성을 부르시며, 그 부르신 백성들의 소명과 역사에 대한 응답을 통해 역사를 만들어갈 뿐 아니라 부단히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가고 계신 것이다.


내가 헤아릴 수 있는 역사는 시간적으로는 불과 20여 년,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나의 경험과 지식이 닿는 지극히 제한된 영역에 불과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그의 편만하심을 생각할 때 한 점에 지나지 않고 티끌에 불과하다. 이러한 인간의 유한을 그의 영원으로 품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나름의 뜻을 두고 가장 합당하게 다루시며,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궁극적인 선과 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통치를 생각할 때, 내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삶의 현장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겸손함으로 서게 된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지금과 여기’라는 역사의 현장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두렵고 떨림으로 서게 된다.

신고

 

“아빠! 나는 세상에서 제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2년 전 자살했던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기업 회장의 막내 딸 있잖아, 그 사람이야.”

올해 중3인 우리 집 큰 아이가 하는 이야기다. 2년 전에 있었던 일을 지금도 가끔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우리 아이에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정말 갖기를 소망하는 모든 조건 -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을 정도의 부를 갖춘 부자 아빠, 국내 명문 대학 출신에 미국 유학 생활 - 을 갖춘 사람이 뭐가 부족하고 뭐 그렇게 힘들어서 자살을 선택했는지 그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아이들은 모르지만 어른들은 다 아는 것

하지만 어른들은 다 안다. 사람들이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외적인 조건을 다 갖춘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한계 상황에 직면케하는 고통이 다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러한 고통은 일정한 시기만 지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각 시기마다 주어지는 고통의 분량이 있으며 이후의 고통이 그 이전의 고통보다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또 우리가 인생의 한 영역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싸운다고 해서 인생의 다른 영역에서 마땅히 당해야할 고통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물론 인생에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무지 지나갈 것 같지 않은 고통도 끝이 있으며, 고통 가운데도 우리를 미소짓게 하는 잔잔한 기쁨이 주어지기도 한다. 때로 하나의 고통과 또 하나의 고통 사이에 평화가 한 동안 지속되기도 하고, 고통의 시간 동안 길러진 내공으로 인해 고통 가운데 숨겨진 축복의 비밀을 누리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 우리의 노력의 결실의 기쁨, 또 때로는 우리 노력과 허물을 넘어선 은총의 열매가 주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공존함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본질이 고(苦)임은 부인할 길이 없다.


겨우 겨우 우째 우째

40대에 접어들면서 부산했던 20대 후반과 30대를 돌아볼 여유가 약간 생겼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조금 자라준 덕분에 생긴 여유가 아닌가 싶다. 20대 후반 결혼과 동시에 아내와 맞추어가는 버거움을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첫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2년 터울로 4명의 아이를 낳았으니 장모님으로부터 “너희는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왜 그러냐?”는 소리를 들을 만도 했다. 비록 아내가 첫 아이 출산과 함께 전업주부로 헌신을 하긴 했지만 주변의 도움 없이 부부의 힘만으로 2년 터울의 4명의 아이를, 그것도 시골에서 방목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서 일일이 돌보며 키운다는 것은 두 사람을 소진시키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첫 아이를 낳는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 발을 들여놓은 기독교사운동은 갈수록 확장되었고 고민과 헌신의 분량을 점점 더 많이 요구했다. 같은 시기 교회에서의 헌신과 요구도 교회의 본질과 방향에 대한 고민과 맞물려 고통스럽게 진행이 되었다.   

“겨우 겨우 우째 우째” 라는 그 시기 내가 썼던 글의 제목과 같이 정말 한 치의 여유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여기 메우고 저기 메우며 살았다. 만성수면 부족에 아플 여유도 없이 뛰어다녔음에도 아내와 아이들, 학교와 학생들, 교회, 좋은교사운동 각각에 대해서 다 충실하지 못한 죄인이었다.


고통보다 더 힘든 것, 권태

그렇게 정신없이 살 때도 가끔 생각했던 것이지만 이렇게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를 약간 넘긴 지금에 와서 많이 생각하는 것은 ‘왜 하나님은 20대 후반 30대라는 그 좋은 젊음의 시기에 이렇게 정신없이 허덕이며 살게 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완전히 정리된 생각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 혈기왕성하고 욕망이 강한 그 시기에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들과 바쁜 일정들 가운데 수고의 용광로에서 연단시키고 그 시기를 무사히 지나가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생각은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를 약간 넘겨 인생에서 어느 정도의 성취와 여유를 갖게 된 내 또래 친구들의 삶을 보면서 더 강하게 하게 된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한다.” 라고 했던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우리는 인생에 극심한 고통이 주어질 때 이 고통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지만, 고통이 지나가고 나면 평안과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권태’가 찾아온다. 그리고 이 권태의 시기는 강한 본능과 죄의 유혹을 동반한다. 특별히 아이를 적게 낳아서 빨리 키워 육아의 고통에서 비교적 빨리 벗어나고, 부모님로 물려받은 유산 혹은 본인의 노력을 통해 빨리 사회 경제적 안정을 누리고 있는 친구들의 경우 다른 사람보다 빨리 찾아온 이 권태의 유혹을 이기기 너무 힘들어 하는 것을 많이 본다. 거기다가 젊음의 혈기와 욕망이 많이 남아있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인 재화가 넘쳐날 때 여기에서 오는 온갖 죄악의 유혹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타락의 열린 길을 이겨내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닌 것이다. 특히나 가치상대주의와 개인의 사적 생활에 대한 불간섭의 경향은 죄와 싸워 이기거나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내공을 쌓지 못한 현대인에게 큰 구실이 되어 버린 상황이다. 가끔 매스콤에 보도되는 권력과 상류층의 타락은 권태에 굴복단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잘 드러내 준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군대에 처음 들어가면 누구나 편한 보직을 원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편한 보직은 그에게 복이 아니라 재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훈련에 작업에 내무 생활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생활이 군대에서의 2년이란 시간 뿐 아니라 인생 전체에 매우 유익함을 군대 생활을 제대로 한 사람들은 다 고백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각 시기마다 우리가 감당해야할 숙제들을 다 주셨다. 물론 이 숙제들은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 능력 이상으로 너무 벅차게 보이고 나의 모든 밑천을 드러내고 젖 먹던 힘까지 소진하게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과 체질을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은 이 정도의 벅찬 숙제를 가지고 끙끙거리는 것이 우리의 죄악된 자아를 낮아지게 하며 우리의 육체적 소욕을 떨쳐버리고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과 이웃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성숙으로 나아갈 정도의 적당한 분량으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참 평안은 어디에?

아무도 고통을 당하기를 원하지 않고 누구나 지금 주어진 고통도 빨리 지나가길 원할 것이다. 하지만 고통을 피해 달아난 또 다른 곳에는 평화와 평안이 아닌 권태가 우리가 기다리고 있으며, 이 권태는 고통보다 훨씬 감당하기 어려운 적이라는 현실을 직면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수많은 선배들이 고통의 상황이 아닌 권태의 상황에서 무너졌고, 지금도 우리의 동료들이 권태의 상황에서 죄와 본능의 나락으로 어이없이 떨어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는 참된 평화와 평안은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내게 주어진 인생의 숙제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정직하게 붙들고 힘에 겨운 수고를 하는 가운데 주어진다. 이 힘겨운 수고 가운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새기며,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몫과 한계를 받아들이며, 하나님이 인생에게 요구하시는 ‘인내’의 분량을 채우고,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내 정체성의 핵심이 될 때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네게 주어진 고통을 벗어버리고 본능과 쾌락을 따라 나아가라는 세상의 유혹을 벗어버리고,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내게 주어진 고통과 숙제를 묵묵히 감당해가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을 일이다. 그것이 참 지혜자의 길이다.

신고


“아빠, 나는 아직까지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 친구들 중에는 자기가 무엇을 전공해서 어떤 직업을 갖고 싶은지 매우 구체적으로 이야기 하는 친구들도 제법 있는데, 나는  솔직히 문과와 이과 중에 어느 쪽으로 가야할지조차 모르겠어.” 올해 고등학생이 된 큰 딸이 하는 이야기다.


꿈이 없던 아이

사실 나도 그랬다. 비록 문화적 자극이 없는 시골이긴 했지만 그래도 친구들 가운데는 명망있는 권력자나 학자가 되어 세상을 바꾸겠다는 거창한 꿈을 말하는 친구도 있었고, 인기있는 전문직이 되어 집안을 일으키겠다는 현실적인 꿈을 이야기하는 친구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분명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미래의 꿈을 이야기하는 친구들을 부러워할 뿐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 확신있게 다가오는 것이 없었다. 심지어 함께 중고등부 활동을 열심히 하던 친구나 선후배 가운데서 목회자나 선교사가 되겠다며 복음전도의 열정을 토로할 때도 그 친구 못지않게  교회 활동에 열심이던 내게는 왜 그런 확신이 주어지지 않는가 하는 한편의 부러움과 다른 한편의 의아함이 들뿐이었다.

고1 말 문과와 이과를 선택할 때도 미래의 진로가 아닌 수학이 약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문과를 선택했고, 서울에 있는 명문대학에 한 명이라도 더 합격을 시키겠다는 고등학교 진학 정책의 결과로 사범대학에 진학을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내가 진학한 과가 인기학과가 아니라는 것으로 인한 열등감과 갈등은 있었지만, 명문 대학이라는 간판이 주는 후광에 안주하고 있었다. 고등학생 때까지 그러했듯이 그냥 열심히만 하면 되겠지 라는 정도의 생각만 하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살 것인가?


하지만 대학의 상황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사는 삶을 용납하지 않았다. 우선 전두환 군부 독재에 저항하기 위해 보장된 삶의 자리를 포기하고 민주화운동이나 노동자와 농민의 삶 한 가운데로 자신을 던지던 당시 캠퍼스 운동권의 분위기는 그 핵심에 들어가 있지 않던 나같은 학생에게도 큰 차원에서 삶의 기준을 제시하고 있었다. 내가 몸담았던 기독동아리가 주는 메시지도 내용상 차이는 있었지만 더 분명하고 어떤 의미에서는 더 혁신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무엇을 먹을까 입을까를 염려하고 나를 위해서 인생을 구상해서는 안 되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것이었다.


감사하게도 복음 안에서의 헌신은 운동권이 요구하는 헌신과는 그 헌신의 기반이 달랐다. 운동권이 요구하는 헌신은 오직 내 속에 있는 의와 당위에 근거한 헌신이었다. 그래서 이 헌신 앞에서 많은 친구들이 오직 자기의 힘만으로 자기를 넘어서야 하는 그 싸움이 너무 힘들었고, 따라서 그 과정에서 자신과 주변이 겪는 아픔과 상처가 너무 커 보였다. 그리고 그 헌신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 자들이 겪는 좌절의 상처도 커 보였다.


복음 안에서의 헌신


하지만 복음 안에서의 헌신에는 하나님이 주시는 자유와 힘이 있었다. 우선 하나님은 내가 어떤 모습이든 무엇을 하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관계없이 있는 모습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신다고 말씀하셨다. 이 말씀은 내 속에 있는 모든 열등감과 우월감,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는 염려를 다 날려버리고 참 자유함을 가져다 주었다. 여기에 더하여 하나님은 나의 미래를 보장해 주셨다. 하나님이 내 인생과 언제든지 함께 하시며 지키시고 보호하시겠다는 것이었다. 특별히 내 인생이 하나님의 크신 계획 아래 있으며, 내가 살아왔던 모든 과정과 앞으로 살아갈 모든 과정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있음에 대한 깨달음은 이전의 내 삶을 새롭게 해석할 수 있는 틀을 제공해 주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실패에 대한 두려움을 넘어서는데 큰 힘이 되었다.


물론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복음 안에서의 헌신에도 버려야 할 것들이 많았고, 나의 욕심과 주변의 기대, 미래에 대한 염려를 넘어서야 하는 것이기에 아픔도 있고 싸움도 있긴 했지만, 운동권 친구들의 헌신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의 자유함과 기쁨이 있었다.


소명의 자리에 있지 않은 것은 다 죄다


하지만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위해서 나를 드리는 과정은 내 삶의 문제에 대한 완벽한 해답이 아니라 출발점이었다. 육체를 입고 구체적인 시간과 공간과 관계 속에서 살아야하는 인간이기에 어디서 무엇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해결되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고민으로 가득 차있던 대학교 3학년 겨울수련회, 당시 강사로 오셨던 정근두 목사님(현 울산교회 시무)에게 당돌한 질문을 던졌다.


“목사님, 젊은이가 한국 교회를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소명 없이 신학교 안 가는 일입니다.”


어쩌면 그 동안 살아왔던 내 전 삶과 대학 3년 동안의 고민이 압축된 그 심각한 고민에 대한 대답으로는 너무도 가벼운 답변이었다. 하지만 그 답변은 내 어깨에 지나치게 들어가 있는 힘을 빼고, 너무 추상적인 수준에 있는 내 고민을 현실에 안착시켜주는 일종의 선문답이었다.


어찌 신학교 뿐이겠는가? 하나님이 가라는 곳에 가고 하나님이 있으라는 그 곳에 있는 것, 그것은 군사로 부름을 받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핵심이 아니겠는가? 믿음으로 하지 않는 모든 것이 죄이듯, 소명의 자리에 서 있지 않는 것은 다 도피요 죄라는 것은 의심할 수 없는 명제였다. 이후 ‘소명’은 내 삶과 고민의 가장 중요한 화두가 되었다. 


소명이란 무엇인가?


내 삶을 소명에 초점을 맞추고 나니 하나님이 지금까지 내 삶을 통해 경험하게 하고 고민하게 했던 것의 의미가 보다 분명하게 해석이 되었고,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과 주시지 않은 것이 훨씬 쉽게 구분이 되면서 받아들여졌다. 말씀과 기도를 통한 하나님의 인도가 조금씩 분명해지고, 하나님이 내 삶의 문을 닫을 때 기다리는 법과 하나님이 아주 미세하게 열어주시는 길을 분별하는 법을 배워가게 되었다.


대학 시절 처음 소명을 고민할 때는 내 관심이 ‘직업’ 혹은 ‘사역’의 영역에 한정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소명을 따라 살아가는 몸부림이 진행되면서 소명은 단지 직업이나 사역의 영역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고 내 전 삶을 포괄하는 개념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나를 어둠으로부터 빛으로, 죄로부터 의로 불러내셔서 하나님이 정하신 분량에 이르기까지 직업과 결혼, 교회는 물론이고 시민으로서의 삶과 모든 일상의 영역에 이르기까지 우리를 부르시고 인도하시며 그 과정 속에서 자신과 긴밀하게 교제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명은 단회적인 과정이 아니라 지속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교사로의 부르심도 임용과정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임용 이후에도 끊임없이 나의 한계와 어려움을 보여주시사 자신의 소명을 다시 점검하게 함을 통해 안일해지고 불순물로 오염된 나의 소명을 정제하시며, 소명을 보다 잘 감당할 수 있는 새 힘을 사모하게 하시며, 이전에 받은 소명을 새로운 시대와 변화에 맞게 한 단계 발전시키신다. 물론 이전에 알지 못했던 새로운 소명으로 인도하기도 하신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속적인 부르심이 직업의 영역 외에도 삶의 모든 영역에서 일어남은 물론이다.


아이에게 소명과 관련된 이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할 수 없었다. 하지만 하나님이 그 과정에서의 차이는 있겠지만 내게 허락하셨던 소명의 길을 큰 딸에게도 허락하시며 인도하실 것을 믿으며, 그것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신고

+ Recent posts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