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무책임화는 어떤가
고등교육을 국가의 책임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은 국민국가가 출현할 당시 중요한 문제였다. 유럽식(대륙식)국가들은 초중등교육과 함께 고등교육도 당연히 국가책임으로 하였지만 영미국가들은 국가무책임화를 표방하였다. 이유는 국가무책임화가 개인의 책임을 인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교육을 국가가 책임을 지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국가체제를 규정짓는 하나의 잣대가 되었으며 이후의 국가간의 경쟁 요소가 되어있다. 독일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은 고등교육분야를 국가책임으로 두고 국가발전을 도모하고 있기도 하다. 영미식은 고등교육분야를 시장의 책임으로 두고 개인의 선택사항으로 한다.
우리나라는 성인제도를 두고 있는 나라이고 이를 교육분야에 적용해 초중등교육을 미성인교육으로 보아 국가책임화하면서도 사립학교를 두어 책임의 일부를 전가시키고 있고 또 성인이 받는 고등교육분야에 대한 국가책임도 일부 인정하고 있다. 그건 국가책임을 인정하는 통일되고 보편화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처럼 18세를 기준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하고 그때까지만 국가가 책임지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국가무책임화를 선언한다면 성인의 국가책임여부에 대한 논란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나라가 국립대학을 두고 국가비용으로 성인을 교육시키는 것은 성인의 자기책임원리에 반한다. 국가가 강제적으로 교육받게 하거나 사후적으로 의무봉사연한을 둔다면 자기책임은 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국립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자기선택이 최우선이고 자유경쟁의 결과로 입학여부가 결정된다. 이는 시장의 경쟁원리가 가감없이 적용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런 교육에 국가가 비용을 부담할 이유가 없다. 단지 국립대학을 설립했다고 해서 무한책임을 질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고등교육에 대해 국가가 책임을 지는 것이 타당한가 여부를 검토해야 하고 근대교육제도를 도입할 당시에 국가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교육제도는 일제가 강제로 이식시킨 것이고 우리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일본제국이 근대교육제도를 도입하면서 고등교육에 대해 어떤 입장에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일본은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후발주자로서의 이점을 갖고 있었다. 다시말해 유럽식(대륙식) 고등교육체제와 영미식 고등교육체제를 보면서 선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근대화가 급한 나머지 양자의 체제를 모두 도입했다. 처음에는 유럽식으로 국립대학을 설립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사립대학도 인가해 주었다.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책임화에 철저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개인책임화에도 철저하지 않았다. 국가건 사인이건 고등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할 수 있기만 하면 그만이고 국민을 계몽시키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초기에 잘못 길을 들어서면 되돌리기 어려워진다. 고등교육분야에서 국가책임화 혹은 무책임화에 철저를 기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 때로는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때로는 인정하지 않는 무원칙은 근대화에 대한 조급성과 교육철학의 부족이 그 원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민이 자기의 책임과 권한 그리고 의무를 충분히 인식한 가운데 자유롭고 창의롭게 살게 하는 것만큼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 것인가. 대학도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고등교육을 국가책임화하는 고등교육정책은 그만큼 시민의 자기책임에 대한 인식을 불명확하게 하고 사회나 국가에 책임을 전가시키기 쉽고 나태해지기 쉽게 한다.
일본에서의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와 시민의 공동참여가 가져온 모습을 보면 혼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스스로 교육정책이 실패한 나라임을 자인하는 나라다. 대학이라는 세계에 국가와 시민이 함께 뛰어들어 서로를 밀어내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여기에서 조금도 다름이 없다.
오늘날 일본에서의 고등교육 개혁의 핵심은 국립대학을 비국가기관화하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무책임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국가기관이 아니라는 사실만 갖고도 국가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열리는 셈이다.
명치유신이후 대학을 설립하는데 있어 두가지 방향이 함께 제시되어 국립대학 설립과 사립대학 설립으로 나타났다. 국립대학이야 국가기관이니까 당연히 국가책임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지 못함은 분명하지만 사립대학마져 단지 사인에 의한 설립기관으로 남겨두고 대학법인으로 등록을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고등교육에 대해서 일단 국가가 책임지고 사인私人이 그 일부를 위임받아 가르치는 체제를 만든 것이었다.
이런 상태가 군국주의 일본에서 60년간 계속되다가 종전이 되면서 맥아더 점령하에서 사립대학에 대해 법인격을 부여하는 조치 - 사립대학의 법인화 - 를 내리게 된다. 원래는 국사립을 막론하고 법인격을 부여할려고 하였으나 국립대학은 반발이 심해 실시하지 못하고 사립대학에 대해서만 법인격을 부여했다. 전전의 명치대학이나 중앙대학이나 조도전대학은 사인에 의한 고등교육기관에 불과했고 국가의 사무를 위임받는 형식을 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전 사인에 의한 사립대학들은 80%에 육박하는 재학생과 졸업생 비율에도 불구하고 대학사회에서 국립대학에 상위의 자리를 내줄 수 밖에 없었는데 이의 복사판을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20%에 달하는 국립대학들과 25%에 달하는 국립대학 재학생이 있는 나라다.
맥아더 점령 당시 국립대학도 시민사회에 돌려주고 법인화해야 한다고 한 후 다시 60년이 지난 2004년도에 이르러서야 국립대학을 비국가기관화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남아있던 100여개의 국립대학과 국립연구소들을 89개로 개편한 후 일제히 법인화해 버린 것이 그것이다.
일본이 대학제도를 도입할 때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을 함께 설립하게 하고 나서 이를 일원화시키는데 120년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대학의 일원화를 이루기 위해서 얼마만큼 시일을 필요로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국가란 모든 대학에 대해 언제나 일관되고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킬 수 있게 될 때가 언제일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다.
국가가 공정하게 등거리를 유지하면서 일관된 관점을 지닐 때만이 대학간의 경쟁이 의미를 갖게 된다. 그동안 일본의 대학들이 국립인가 아니면 사립인가에 따라 국가의 시혜가 달라지고 불공정경쟁이 일어나고 그 결과 대학사회의 전반적 낙후를 가져온데 대한 개탄의 글들이 2004년의 일본 국립대학 법인화 주장의 글 속에 많이 담겨있다.
대학이란 성인사회인 이상 시민의 창의보다 유효한 것은 없다. 국가가 우수한 대학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혹시 하나의 국가가 모든 자원을 동원해 우수한 대학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아마도 김일성대학은 국가로부터 그런 시혜를 받고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그런 건 예외이고 국가가 해야할 분야는 너무나 많다. 고등교육에 올인 -다잡기- 하는 국가란 오늘날 생각하기 어렵다. 또 대학이란 존재가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고 학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면 국가보다 시민사회 속에 놓이고 시민의 책임하에 발전을 도모하는게 유효할 것이다. 여기서 일본이 국립대학 법인화를 논의하면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를 살펴보자.
일본에서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대학의 독립을 요구하는 법인화논의는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제국대학 시절에는 주로 대학교수 등이 학문의 자유를 위해 법인화를 요구하고 정부가 여기에 반대했다고 한다면 전후 점령하의 교육개혁 이후에는 정부, 경제단체 등 대학 외부에서 대학의 교육연구기능 강화와 규제완화의 일환으로 법인화를 요구하고 대학교수가 학문의 자유를 내세워 여기에 저항하는 구도를 보이고 있다. 제국대학령이 공포된 지 채 3년이 지나지 안은 1889년에 제국대학 내부에서 관립학교독립론, 자치론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토야마 마사카즈 (1848-1900), 기쿠치 다이로쿠(1855-1917) 등 6명의 제국대학 교수가 서명한 제국대학독립안사고와 호즈미 야츠카(1860-1912) 등 39명의 교수가 연명한 제국대학조직사안을 들 수 있다. ‘제국대학독립안사고’에서는 “제국대학은 천황의 특별보호아래 법률상 한 개인과 같이 권리를 갖고 의무를 부담하며 그 업무를 스스로 처리하는”, “일개의 독립체로 해야 한다”고 해 대학을 “천황의 특별보호아래 독립적인 법인격을 갖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향철 동방학지 132집 일본의 고등교육개혁 조류 및 국립대학 법인화 170쪽 2005. 12>
우리나라도 해방과 건국과정을 거치며 고등교육체제를 우리의 의지대로 세울 수 있게 되었을 때 고등교육을 국가책임으로 할 것인가 시장에 두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건국이 시급했고 이념대결에서 승리하여야 한다는 명제앞에 차분하게 검토할 여유가 없었다. 일본이 이식한 대학제도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군정당국을 포함하여 건국자들이 일본의 고등교육체제를 비판할 안목이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고등교육체제의 모순이 이제야 겨우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니까.
고등교육을 국가와 시장이 함께 맡는 모순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건 그리 어려운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와 시장이 함께 경쟁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국가의 승리는 시장의 패배를 의미하고, 시장의 승리는 국가의 패배를 의미하는데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과 건국 후 6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국사립대학간에 경쟁을 시키는 그런 모순에 대한 비판이 희소한 것을 보면 다른 이유가 있는게 분명해 보인다. 필자는 우리나라 고등교육에 관한한 시장의 패배를 선언해야 한다고 본다. 대학사회의 몰락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지 아니한가.
그것은 일본도 그러했지만 국가기관으로서의 국립대학 출신들이 사회의 상층부를 형성함에 따라 교육철학적 관점도 무시하고 국가와 대학간의 바람직한 관계설정도 무시한 채 막무가내로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의 혼용체제를 유지하려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미 형성된 체제에 대한 단순무비한 수용이 그런 결과를 낳게 한 것이다.
대학은 모두 국립이거나 사립이어야 국가가 일관된 고등교육정책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국사립이원체제는 그를 불가능하게 하는 체제이고 교육철학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러나 일본이 근대화가 시급한 나머지 혼용체제를 수립했드시 우리도 아무런 비판의식없이 혼용체제를 답습했고 현상유지를 원했다.
이유는 뒤에 잠깐 언급되겠지만 한줌도 안되는 기득권이 소중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어쨌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국가이고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사립일원화를 하고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무책임화를 단행했어야 했는데 이때를 놓치고 나서 60년이 지나고 이제와서 바로잡을려고 하니 태산을 옮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가정법이지만 해방 당시에 경성제국대학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국립대학을 설립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경성제국대학을 불하해 사립대학화했으면 그 결과가 어떨까.
비록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고 있을지라도 과감하게 시장에 맡겼으면 우리나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처럼 우리나라 대학들이 세계무대에서 낙후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기업이 성공한 것처럼 대학이 못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초중등교육에 전념하고 고등교육은 시장에 맡기는 나라가 되었다면 노벨상은 몇 개쯤 갖고오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한국인의 재능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기에. 또 고등교육을 시장에 맡겼다면 학벌의 출현은 분명이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국가의 배경을 갖지 않는 대학은 최소한 겸손한 대학일 것은 분명하니까. 시장에서 최선을 다해 1등대학이 되었다면 그런 대학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그런 대학을 갖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해방정국에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은 반대에 직면했었는데 관철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아쉬움을 남긴다.
경성제국대학 출신들이 친일파들인데 그들이 그대로 서울대학교에 남게 되면 친일파에 대해 청산이 되지 않음은 물론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지배가 계속된다는 게 주 이유였다.
다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역사의 교훈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해방당시 논의가 분분했던 서울대학교 설립안 - 소위 국대안 -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국대안과 그 반대운동의 이념적 성격을 교육체계와 관련하여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첫째, 국대안은 미군정기 교육정책의 기본방향 속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미군정이 표방한 지배이념으로서의 반공이념이나 보수주의 정책과 무관할 수 없었다. 국대안은 당시 교육적 난제들을 해결하기위해 제기된 측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립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시기인 독립정부 수립 이전에 제기되었다는 점,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그 타당성이 미진했다는 점에서 사회적 지지기반을 결여하고 있었다.
둘때, 국대안에 내포된 현실적, 이념적 모순을 지적하면서 전개된 국대안 반대운동은, 초기에는 좌,우익을 초월한 교육운동의 성격을 뚜렷이 나타냈다가, 1947년부터는 좌,우익 정치세력의 대립상황과 맞물려 정치운동의 양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셋째, 국대안 반대운동의 대항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국대안 반대세력의 교육이념과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이해되었다. 그 결과 국대안 반대세력의 교육이념은 그 명시적 주장에 있어서는 자주적인 교육, 학교운영의 민주화, 그리고 철저한 일제잔재의 청산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정치이념은 현실개혁적, 좌익적 성향의 정치이념이 혼재되어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국대안 반대운동이 현실개혁적, 조직적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국대안 반대운동을 좌익정치운동으로만 단순화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미군정기라는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전개되었던 국대안 반대운동은 당시의 교육체제 형성에 구조적인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대안 반대운동은 교육체제내의 비판적 세력들이 갖고 있던 교육적, 정치적 이념을 구체화시켰다는점에서 주목을 받을 만 하다.<최혜월의 연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국대안 반대운동의 이념적 성격에 관한 교육사회학적 접근 초록- 중에서 1986.12>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을 반대한 자들이 대부분 사회주의자들인데 고등교육기관을 국가기관으로 설립하는 것을 반대한 것은 일종의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다. 지금도 사회주의자들은 고등교육을 국가의 이름으로 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대안 반대자들이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을 반대한 것은 고등교육을 시장이 맡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고 친일파 청산, 자주교육, 민주화 등의 명분으로 사회주의제국을 건설하겠다는 다분히 정치적 구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경성제국대학의 국립서울대학화를 반대한 것이지 지방국립대학설립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한편 국대안을 수립한 자들도 모든 대학을 국립대학화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경성제국대학을 국립대학화함으로서 국가가 요구하는 기예와 학술을 갖춘 인재를 스스로 양성해서 공급받고 싶어한 것으로 일본이 국립대학을 설립했던 이유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물론 친일파가 온존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애써 귀를 막았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나라 고등교육 체제를 정비할 수 있는 호기를 기득권을 인정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좁은 시각으로 바라보기만한 것이다. 결과를 두고 말한다면 양측의 주장은 어느 정도 맞았다고 할 수 있다. 국대안반대론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형성된 기득권은 국립서울대학교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고 국가의 배려속에 성장을 거듭해 국가학벌로 등극했다.
또 국대안을 수립한 군정측에서 주장한 거처럼 단기간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우수한 인재들을 국립서울대학교가 공급해 개발연대를 감당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잃은 건 개발연대을 지나면서 비로소 알게된 고등교육의 전반적 낙후라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일제가 운용해온 국사립 이원체제를 보면서 이 땅에 똑같은 방식의 고등교육체제가 도입되고 해방과 건국 사이에 국대안 반대운동을 누르면서 우리나라 국립대학은 각도별로 설립된다. 고등교육 수요와 맞물려 국립대학과 사립대학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그 중에서도 국립서울대학교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면서 1974년도에 동숭동에서 관악산 기슭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아마 서울대학교 관계자와 선배들은 좋아했겠지만 이때야 말로 우리나라 고등교육이 묘혈을 판 시기가 아닌가 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겠지만 서울대학교 졸업식에서 총장의 축사를 뒤로 돌아서서 듣곤 했다. 이유는 여럿이 있겠지만 국가가 베푼 고등교육에 대한 고마움을 그렇게 갚아서는 안되는 게 아니겠는가. 자기 비용으로 고등교육을 받았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최고의 대학을 졸업했다는 자부심을 체제에 대한 거부로 표현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대학을 다니고서 한 행동들이 그랬다.
국립서울대학교가 관악산 기슭으로 이동한 것은 국립서울대학교 자체만을 두고 보면 하나의 축복일 수도 있다. 정통성이 취약한 군사정권이 최고의 에리뜨를 배출하는 대학에 호의를 베푸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그런 대학이 출현한다는 것은 대학이 권력의 경지로 승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국가학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학이 스스로 최선을 다하면 최고의 대학이 될 수 있다는 단순한 원리를 무시하고 국가의 권력이 동원될 때 나머지 대학들이 발전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에서 서울대학교를 능가하는 대학을 그대는 기대하는가.
서울대학교는 기회있을 때마다 정부로부터 벗어날려고 했다. 그건 비원悲願이 된지 오래다. 그 해법이 국립대학 법인화이다. 원래는 특수법인이 되기를 기대했는데 그것은 서울대학교만의 법인화를 의미했다. 지금도 서울대학교병원은 법인형태를 갖추고 있다. 서울대학교가 법인이 아니면서 그 부속기관이 법인인 셈이다. 지금 정부에서 추진하는 국립대학 법인화는 모든 국립대학의 법인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특수법인이 아니다.
서울대학교가 1989년도에 연구 발표한 “국립대학의 특수법인화에 관한 연구”를 보면 그 목적과 필요성은 다음과 같다.
그 동안 정부차원에서나 또는 국립대학 자체에서 국립대학의 조직과 운영의 개선을 위한 노력이 꾸준히 전개되어 왔고, 이를 위한 연구도 계속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국립대학이 안고 안고있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국립대학도 국가기관의 일종이기 때문에 정부 자체의 공통적인 법규와 지침에 따라야 하므로 교육기관으로서의 특수성을 살리지 못하고 정부로부터 획일적인 통제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즉 대학으로서의 자율적인 운영을 확보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본연구는 이러한 문제의 인식하에 대학운영의 자율성과 능률성을 확보하는 방안의 하나로써 국립대학체제를 특수법인체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와같은 연구는 현재 여러방면에서 걸쳐서 민주화 자율화가 심도있게 논의되고 있는 시점에서 고등교육기관의 자율화를 위한 연구의 일환으로 그 의의와 중요성이 크다고 하겠다.<김동건, 선우중호 국립대학의 특수법인화에 관한 연구 1989. 서론부분>
정부는 2006년도에 국립대학 법인화안을 만들어 발표하고 공청회를 여는 것을 계기로 국립대학 법인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서울대학교도 자체적으로 세미나를 열고 의견을 수렴하고 있기는 하지만 조건을 많이 달아 속 뜻을 분명히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 전임 정운찬 총장이나 현 이장무 총장도 법인화를 지지한다고 발표한 바 있지만 교수협의회에서는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국립대학 법인화는 국가기관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고등교육이 시장의 책임이어야 하고 국가는 시민들의 자기책임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리가 담겨있다. 또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시장과 경합해서는 안된다는 원칙도 담겨있다. 우리나라가 사립대학체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시장과 경합하지 않지만 사립대학체제를 두고 또 국립대학을 둔다면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국립대학의 법인화를 해야 한다면 당연히 대학의 운영자금도 자기가 조달하게 해야 한다. 사립대학과 아무런 차이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법인화가 자율성을 제고시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은 성립하지 않는다. 법인화는 책임을 누구에게 지는가 하는데서 국가책임인가 아니면 법인책임인가를 논하기 위해서이지 자율성과 관계가 없다. 자율성은 운영자금을 누가 책임지는가와 관계가 있다. 만일 자기가 조달한다면 자율성이 보장되고 국가가 책임진다면 자율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그런데 법인화하면서 자율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는 법인화한 대학에 대한 국고지원에 대해 자기가 조달한 것처럼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에 대해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으로 국민의 조세부담원칙을 침해하는 것이다. 이를 모를리 없는 국립대학들이 자율성을 부르짖으니 이해하기 힘들다.
국립대학을 법인화하고 국고지원을 중단해야 한다. 법인화하면서 국고를 지원할 명분이 없다. 무슨 이유로 국고를 지원할려 하고 대학측은 계속적인 국고지원을 기대하는가. 물론 일시적이고 급작스런 국고중단은 대학재정을 파탄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고 따라서 그렇게 하자는 것은 아니다. 재정을 마련할 방도를 열어두어야 하고 그때가지 시간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국고를 지원하지 않는 법인화여야 하고 굳이 국고를 지원할려고 하면 법인화를 할 이유가 없다. 비국가기관화하면서 국고를 지원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킬 것이다.
Ⅱ. 국립대학의 법인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
국립대학을 법인화해야할 이유는 많다. 그러나 이를 자세히 보면 절대적 조건과 상대적 조건이 있고 이를 나누어볼 필요는 있다. 흔히 효율성이니 공공성이니 하는 가치들은 상대적인 것들이고 절대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절대적 가치들과 상대적 가치들이 혼재하는 혼란과 모순도 극에 달한 느낌이다. 따라서 이 기회에 국립대학의 법인화에 요구되는 조건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절대적 조건들
1) 고등교육분야를 국가고유업무로 볼 때 국민모두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야 할텐데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고등교육분야는 어떤 경우에도 특정된 소수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원하는 자 모두에게 고등교육을 국가의 이름으로 베풀수는 없는 일이다. 국민이 동의한다면 한정된 소수에게 고등교육을 국가의 이름으로 베풀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립대학이 허용되는 상황에서, 또 민주주의 시대에 국민의 절대다수가 동의하는 경우란 상상할 수 없다.
2) 고등교육이란 어디까지나 성인의 자유선택일 뿐이다. 국가가 나서서 누군가에게는 고등교육을 제공하고 누군가에게는 제공하지 않을만큼 세세한 부분까지 간여할 성질이 아니다. 그리고 국가란 그럴만큼 권위를 지닌 존재도 아니다.
3) 국가기관과 민간기관의 경합은 모순이다. 우리나라는 누구나 잘 알드시 고등교육 분야를 국가(국립대학)와 시장(사립대학)이 함께 맡고 있다. 마치 국가와 시장이 서로 보완관계이고 협력관계이기나 한 것처럼. 그러나 실제는 어떤가. 국가기관으로서의 국립대학들이 전국적으로는 국립서울대학교가 지방단위로는 지방소재국립대학들이 한결같이 절대우위체제를 점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인과 경합할 수 없다. 오직 소송의 당사자로서 국가가 사인과 경합할 수 있을 뿐이다.
4) 고등교육은 국가의 고유업무가 아니다. 이런 문제는 민간이 고등교육을 수행할 능력이 없을 때 그리고 국가만이 그런 능력을 감당할 수 있었을 때는 덮혀져 있었다. 우리의 현대적 의미의 고등교육은 일제시대에 열렸는데 일본제국은 명치유신 후에 곧바로 국립대학 설립에 들어갔다. 동경제국대학의 설립이 그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민간에도 대학설립의 기회를 주어 조도전 대학 등 많은 민간대학들이 설립되었다.
이는 일본제국이 고등교육분야를 국가의 고유업무로 파악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방 후 국가건설에 매진하던 시절과 그 이후에도 이런 문제에 대해 심도있게 논의되지 않은 것은 불행한 일이다. 백보를 양보해 경제재건이 급선무였다고 할 지라도 어느 정도 국가가 안정되고 경제성장의 기반을 다진 후에는 고등교육의 국가고유 업무여부를 논의했어야 한다. 그리하여 고등교육에 대해 전적인 무책임화를 단행했어야 했다고 본다.
5) 고등교육에 대해 국가와 민간이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모든 대학에 대해 일관된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에 위배된다. 언제나 국가는 고등교육기관에 대해 동등한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 특정대학을 배려한다는 것은 그에서 배제된 대학에 대해 불이익을 안겨주는 것으로 대학사회에 대한 국가에 의한 인위적 서열을 조성하는 것이다.
6) 고등교육분야는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이유는 대학이 학문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중등교육처럼 민주시민의 자질을 갖추게 한다든가 개인의 인격 성장에 기여한다는 역할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학문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학문이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하면 진리를 탐구할 수 있을 것인가. 헌법은 이를 보장하기 위하여 학문의 자유라는 조항을 두고 국민의 기본적 권리로 인정하고 있다. 이는 국가가 학문의 자유와 이를 목적으로 하는 고등교육기관설립을 보장한다는 것을 뜻하지 국가가 스스로 학문의 자유와 고등교육기관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2. 상대적 조건들
1) 효율성
국립대학의 법인화 논의는 국립대학들이 국가기관이고 조직원이 국가공무원이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비효율과 비능률을 제거하고 민간조직과 같은 수준으로 법적 지위를 전환시켜 상황변화에 적절히 적응시키고 독립채산제를 도입해 자기책임의 원리를 도입하고 재직원의 신분도 민간신분으로 전환시키자는 것이 명분이다. 그것이 세계화시대에 대학이 살아남을 길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효율성과 능률성을 제고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민간기구화한 법인이라고 해도 그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상대적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국립대학이 반드시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이 성립하지 않는다는데서 더욱 그렇다. 원래 효율성이니 능률성이니 하는 것은 현상황의 존재를 긍정하고 문제점만을 개선하자는 것으로 개혁보다는 낮은 단계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에서 국립대학 법인화 논의의 핵심으로 삼는 것이 이사회구성과 총장에 대한 선출문제인데 이는 법인화가 반드시 효율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국립대학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법인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도대체 누가 한 것인가. 학교법인인 사립대학들은 모두 국제경쟁력이 있다는 말인가.
2) 공공성
흔히 교육의 공공성을 말한다. 이를 위해 국가는 초중등교육의 국가의무화를 선언하고 그의 실현을 위해 진력하고 있다. 그러나 고등교육에 대해서도 공공성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데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즉 초중등교육의 국가책임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고등교육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고등교육이란 기본적으로 고급지식을 의미하고 그런 지식을 누구나 갖출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일 있다면 그런 건 고급지식일 수가 없다. 고등교육이 고급지식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것이라면 어짜피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 수 밖에 없다.
공공성이란 그 의미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가격이 싸다는 의미 이상을 벗어날 수 없지 않겠는가. 고급지식을 생산하는 고등교육이 쉽게 접근하고 가격이 싸야 한다는 것은 필요에 의해서 일하고 원하는 만큼 얻을 수 있다는 구호처럼 달콤하기는 하지만 실현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실현된다면 다시 그 이상의 고급지식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교육기관이 생겨날 것이다. 그랑제콜처럼. 그리고 MBA처럼.
교육의 공공성은 초중등분야에 한정되어야 하고 국가의 예산도 초중등교육에 집중되어야 한다. 고등교육의 공공성은 국가의 시장에 대한 감시자 역할이면 충분하고 누구에게나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 이상 집행자로서의 짐을 훌훌 내려놔야 한다고 본다. 80%의 사립대학들이 있는나라에서 고등교육 접근기회는 충분히 주어져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싼 비용의 고등교육이란 모순을 담은 말이라고 보여진다.
Ⅲ. 고등교육체제 개혁은 국립대학의 법인화를 의미하는가
그동안 고등교육체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많았는데 그 아이템을 보면 교수의 질을 높이기 위해 외국의 교수들을 초빙한다든지 수업을 영어로 한다든지 교수의 정년을 줄인다든지 하는 자질구레한 것들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국립대학들은 국고의 전폭적인 지원을 늘 요구하고 있고 사립대학들은 등록금의 자율화나 기여금입학제의 도입 등을 주장하고 있다. 국사립대학을 막론하고 정부의 규제 축소를 주장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요구들은 아주 오래된 것들이고 시정이 잘 안되는 걸 보면 주장에 힘이 실리지 않았거나 실현불가능한 것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 유학러시가 일어나고 있다. 외국에서는 다 쓰러져가는 대학이 한국학생들로 인해 활력을 되찾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우리 대학에 대한 실망이 유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방소재 사립대학들은 폐교를 우려해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온갖 규제를 다하던 당국은 갑자기 자기책임이라고 하면서 나몰라라 하고 있다.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든지 폐교하든지 알바 없다는 투다.
폐교할 때 폐교하더라도 지방소재 대학끼리 당당하게 경쟁한번 하게 해주는게 어떨까. 무슨 말인가 하면 지방은 지방대로 지방소재 국립대학들이 국립이라는 모자를 쓰고 앉아 공정경쟁을 훼손하면서 독야청청하고 있다. 지금은 서울에 소재하는 사립대학들이 서열상위에 올라 위기의식을 느끼지만 지방소재 대학끼라 공정하게 제스스로의 능력으로 경쟁할 의지는 조금도 없어 보인다. 있다면 당장 국고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운영자금을 스스로 조달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사립대학이 그렇게 해왔드시.
고등교육이 국민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국사립을 막론하고 그렇다. 기업이나 일반사회에서도 대학이 인재를 키우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이다. 그러나 해법이 논의의 수준에서 맴돌 뿐이다. 한 나라의 발전이 고등교육에 기초한다면 문제의 본질을 바로 보고 서둘러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우리나라 교육체제가 일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늘 생각해오고 있다. 일본을 넘어 미국을 보아야 한다. 미국의 초중등교육의 국가책임만큼 우리도 국가책임정도를 높혔으면 한다. 미국은 95%의 초중등학교가 공립학교이고 단순학제를 운영한다. 우리나 일본처럼 사립중등학교의 비율이 높지도 않고 복선제 학제를 운영하지도 않는다. 이유는 국가책임을 명쾌하게 하고 초중등교육의 보편교육을 실현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고등교육에 대해서는 무책임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고등교육기관을 위한 연구과제별 기금은 최대한 조성해 대학에 제공하지만 그게 운영자금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운영자금을 자동으로 국립대학에 지원하고 있다. 이는 국가에 의한 특혜라는 말 아니고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이제는 사립대학도 충분히 인재를 배출할 능력이 있다. 굳이 국립대학이 있어야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그런 특혜를 없애야 한다. 그리고 사립대학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국립대학에 주는 특혜를 없애기만 하면 된다. 시간은 물론 필요하지만 당위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이 모두는 일본의 교육체제 속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미국을 보자. 누군가는 프랑스나 독일처럼 유럽을 보자고 한다. 그러나 그런 나라들이 세계학문을 주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미 상식에 속한다. 비록 고등교육이라는 수요를 채워주는 복지국가로 가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유럽의 국가들이라고 해서 교육복지 수준이 더 높다고 할 수도 없다. 물론 대학이 입학한 자들에게는 교육복지가 돌아가지만 그 비율이 아직도 고교졸업생의 40%를 겨우 상회할 정도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졸업생 중 대학교육이수 희망자가 90%를 넘고 그 중 실제로 대학에 입학하는 자도 90%를 넘는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나 미국은 세계 최고의 대학진학율을 보이고 있는 나라이고 그런 의미에서 유럽국가들보다 더 높은 교육복지를 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자기비용이란 문제가 있지만 고등교육기회를 획득한다는 측면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일본이 120년만에 최대의 교육개혁에 착수한 게 국립대학을 정부기구에서 배제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도 많은 대학개혁 과제가 있을 수 있지만 더 이상 국립대학을 운영하지 말고 국가의 교육에너지를 초중등교육에 집중했으면 한다. 초중등교육에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를 해결하기에도 바쁜 정부가 고등교육을 일부(20%)나마 움켜쥐고 있을 이유가 무엇이 있을 것인가.
고등교육을 국가의 책임으로 할 것인가 하는 것은 국민국가가 출현할 당시 중요한 문제였다. 유럽식(대륙식)국가들은 초중등교육과 함께 고등교육도 당연히 국가책임으로 하였지만 영미국가들은 국가무책임화를 표방하였다. 이유는 국가무책임화가 개인의 책임을 인식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등교육을 국가가 책임을 지게 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국가체제를 규정짓는 하나의 잣대가 되었으며 이후의 국가간의 경쟁 요소가 되어있다. 독일과 프랑스를 포함한 유럽의 많은 사회주의 국가들은 고등교육분야를 국가책임으로 두고 국가발전을 도모하고 있기도 하다. 영미식은 고등교육분야를 시장의 책임으로 두고 개인의 선택사항으로 한다.
우리나라는 성인제도를 두고 있는 나라이고 이를 교육분야에 적용해 초중등교육을 미성인교육으로 보아 국가책임화하면서도 사립학교를 두어 책임의 일부를 전가시키고 있고 또 성인이 받는 고등교육분야에 대한 국가책임도 일부 인정하고 있다. 그건 국가책임을 인정하는 통일되고 보편화된 기준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뜻이다. 미국처럼 18세를 기준으로 고등학교를 졸업하게 하고 그때까지만 국가가 책임지고 그 이후에 대해서는 국가무책임화를 선언한다면 성인의 국가책임여부에 대한 논란은 사라질 것이다.
우리나라가 국립대학을 두고 국가비용으로 성인을 교육시키는 것은 성인의 자기책임원리에 반한다. 국가가 강제적으로 교육받게 하거나 사후적으로 의무봉사연한을 둔다면 자기책임은 면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 국립대학에 입학하는 것은 자기선택이 최우선이고 자유경쟁의 결과로 입학여부가 결정된다. 이는 시장의 경쟁원리가 가감없이 적용되는 것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런 교육에 국가가 비용을 부담할 이유가 없다. 단지 국립대학을 설립했다고 해서 무한책임을 질 수는 없는 일이다.
이런 문제를 풀기 위해서 우리는 먼저 고등교육에 대해 국가가 책임을 지는 것이 타당한가 여부를 검토해야 하고 근대교육제도를 도입할 당시에 국가가 어떤 입장을 취했는지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근대교육제도는 일제가 강제로 이식시킨 것이고 우리의 의사가 반영된 것이라고 할 수는 없다. 따라서 일본제국이 근대교육제도를 도입하면서 고등교육에 대해 어떤 입장에 있었는가를 살펴보아야 한다. 일본은 근대국가를 건설하는 과정에서 후발주자로서의 이점을 갖고 있었다. 다시말해 유럽식(대륙식) 고등교육체제와 영미식 고등교육체제를 보면서 선택의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근대화가 급한 나머지 양자의 체제를 모두 도입했다. 처음에는 유럽식으로 국립대학을 설립했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사립대학도 인가해 주었다.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책임화에 철저하지 않은 것이다. 물론 개인책임화에도 철저하지 않았다. 국가건 사인이건 고등교육기관을 설립 운영할 수 있기만 하면 그만이고 국민을 계몽시키는 것보다 더 급한 일이 없었다.
그러나 초기에 잘못 길을 들어서면 되돌리기 어려워진다. 고등교육분야에서 국가책임화 혹은 무책임화에 철저를 기하지 않고 경우에 따라 때로는 국가책임을 인정하고 때로는 인정하지 않는 무원칙은 근대화에 대한 조급성과 교육철학의 부족이 그 원인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시민이 자기의 책임과 권한 그리고 의무를 충분히 인식한 가운데 자유롭고 창의롭게 살게 하는 것만큼 국가를 발전시킬 수 있는 게 무엇이 있을 것인가. 대학도 거기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다. 고등교육을 국가책임화하는 고등교육정책은 그만큼 시민의 자기책임에 대한 인식을 불명확하게 하고 사회나 국가에 책임을 전가시키기 쉽고 나태해지기 쉽게 한다.
일본에서의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와 시민의 공동참여가 가져온 모습을 보면 혼란 그 자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은 스스로 교육정책이 실패한 나라임을 자인하는 나라다. 대학이라는 세계에 국가와 시민이 함께 뛰어들어 서로를 밀어내는 모습을 연출하고 있고 우리나라도 여기에서 조금도 다름이 없다.
오늘날 일본에서의 고등교육 개혁의 핵심은 국립대학을 비국가기관화하는 것이다. 그것이 국가무책임화를 뜻하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국가기관이 아니라는 사실만 갖고도 국가책임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길은 열리는 셈이다.
명치유신이후 대학을 설립하는데 있어 두가지 방향이 함께 제시되어 국립대학 설립과 사립대학 설립으로 나타났다. 국립대학이야 국가기관이니까 당연히 국가책임이라고 할 수 있고 따라서 권리와 의무의 주체가 되지 못함은 분명하지만 사립대학마져 단지 사인에 의한 설립기관으로 남겨두고 대학법인으로 등록을 받지 않았다. 그러니까 고등교육에 대해서 일단 국가가 책임지고 사인私人이 그 일부를 위임받아 가르치는 체제를 만든 것이었다.
이런 상태가 군국주의 일본에서 60년간 계속되다가 종전이 되면서 맥아더 점령하에서 사립대학에 대해 법인격을 부여하는 조치 - 사립대학의 법인화 - 를 내리게 된다. 원래는 국사립을 막론하고 법인격을 부여할려고 하였으나 국립대학은 반발이 심해 실시하지 못하고 사립대학에 대해서만 법인격을 부여했다. 전전의 명치대학이나 중앙대학이나 조도전대학은 사인에 의한 고등교육기관에 불과했고 국가의 사무를 위임받는 형식을 취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전전 사인에 의한 사립대학들은 80%에 육박하는 재학생과 졸업생 비율에도 불구하고 대학사회에서 국립대학에 상위의 자리를 내줄 수 밖에 없었는데 이의 복사판을 우리나라에서 볼 수 있다. 지금도 우리나라는 20%에 달하는 국립대학들과 25%에 달하는 국립대학 재학생이 있는 나라다.
맥아더 점령 당시 국립대학도 시민사회에 돌려주고 법인화해야 한다고 한 후 다시 60년이 지난 2004년도에 이르러서야 국립대학을 비국가기관화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남아있던 100여개의 국립대학과 국립연구소들을 89개로 개편한 후 일제히 법인화해 버린 것이 그것이다.
일본이 대학제도를 도입할 때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을 함께 설립하게 하고 나서 이를 일원화시키는데 120년이 필요했던 것이다.
우리나라가 대학의 일원화를 이루기 위해서 얼마만큼 시일을 필요로 하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것은 국가란 모든 대학에 대해 언제나 일관되고 공정하게 대해야 한다는 원칙을 지킬 수 있게 될 때가 언제일지 아무도 모른다는 말이다.
국가가 공정하게 등거리를 유지하면서 일관된 관점을 지닐 때만이 대학간의 경쟁이 의미를 갖게 된다. 그동안 일본의 대학들이 국립인가 아니면 사립인가에 따라 국가의 시혜가 달라지고 불공정경쟁이 일어나고 그 결과 대학사회의 전반적 낙후를 가져온데 대한 개탄의 글들이 2004년의 일본 국립대학 법인화 주장의 글 속에 많이 담겨있다.
대학이란 성인사회인 이상 시민의 창의보다 유효한 것은 없다. 국가가 우수한 대학을 만들 수는 없는 일이다. 혹시 하나의 국가가 모든 자원을 동원해 우수한 대학을 만들겠다고 한다면 어떨지 모르겠다. 아마도 김일성대학은 국가로부터 그런 시혜를 받고 있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그런 건 예외이고 국가가 해야할 분야는 너무나 많다. 고등교육에 올인 -다잡기- 하는 국가란 오늘날 생각하기 어렵다. 또 대학이란 존재가 진리를 탐구하는 곳이고 학문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면 국가보다 시민사회 속에 놓이고 시민의 책임하에 발전을 도모하는게 유효할 것이다. 여기서 일본이 국립대학 법인화를 논의하면서 어떤 고민을 했는지를 살펴보자.
일본에서 국가권력으로부터의 대학의 독립을 요구하는 법인화논의는 이미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제국대학 시절에는 주로 대학교수 등이 학문의 자유를 위해 법인화를 요구하고 정부가 여기에 반대했다고 한다면 전후 점령하의 교육개혁 이후에는 정부, 경제단체 등 대학 외부에서 대학의 교육연구기능 강화와 규제완화의 일환으로 법인화를 요구하고 대학교수가 학문의 자유를 내세워 여기에 저항하는 구도를 보이고 있다. 제국대학령이 공포된 지 채 3년이 지나지 안은 1889년에 제국대학 내부에서 관립학교독립론, 자치론이 등장한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토야마 마사카즈 (1848-1900), 기쿠치 다이로쿠(1855-1917) 등 6명의 제국대학 교수가 서명한 제국대학독립안사고와 호즈미 야츠카(1860-1912) 등 39명의 교수가 연명한 제국대학조직사안을 들 수 있다. ‘제국대학독립안사고’에서는 “제국대학은 천황의 특별보호아래 법률상 한 개인과 같이 권리를 갖고 의무를 부담하며 그 업무를 스스로 처리하는”, “일개의 독립체로 해야 한다”고 해 대학을 “천황의 특별보호아래 독립적인 법인격을 갖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이향철 동방학지 132집 일본의 고등교육개혁 조류 및 국립대학 법인화 170쪽 2005. 12>
우리나라도 해방과 건국과정을 거치며 고등교육체제를 우리의 의지대로 세울 수 있게 되었을 때 고등교육을 국가책임으로 할 것인가 시장에 두어야 할 것인가를 결정했어야 했다. 그러나 건국이 시급했고 이념대결에서 승리하여야 한다는 명제앞에 차분하게 검토할 여유가 없었다. 일본이 이식한 대학제도를 거의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고 할 수 있다. 미군정당국을 포함하여 건국자들이 일본의 고등교육체제를 비판할 안목이 부족했는지도 모른다. 일본의 고등교육체제의 모순이 이제야 겨우 드러나고 있는 실정이니까.
고등교육을 국가와 시장이 함께 맡는 모순에 대한 이해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건 그리 어려운 논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국가와 시장이 함께 경쟁한다면 결과가 어떻게 될 것인가. 국가의 승리는 시장의 패배를 의미하고, 시장의 승리는 국가의 패배를 의미하는데 말이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과 건국 후 60년이 넘은 지금까지도 국사립대학간에 경쟁을 시키는 그런 모순에 대한 비판이 희소한 것을 보면 다른 이유가 있는게 분명해 보인다. 필자는 우리나라 고등교육에 관한한 시장의 패배를 선언해야 한다고 본다. 대학사회의 몰락의 소리가 들려오고 있지 아니한가.
그것은 일본도 그러했지만 국가기관으로서의 국립대학 출신들이 사회의 상층부를 형성함에 따라 교육철학적 관점도 무시하고 국가와 대학간의 바람직한 관계설정도 무시한 채 막무가내로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의 혼용체제를 유지하려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미 형성된 체제에 대한 단순무비한 수용이 그런 결과를 낳게 한 것이다.
대학은 모두 국립이거나 사립이어야 국가가 일관된 고등교육정책을 유지할 수 있게 된다. 국사립이원체제는 그를 불가능하게 하는 체제이고 교육철학적으로 아무런 근거가 없다. 그러나 일본이 근대화가 시급한 나머지 혼용체제를 수립했드시 우리도 아무런 비판의식없이 혼용체제를 답습했고 현상유지를 원했다.
이유는 뒤에 잠깐 언급되겠지만 한줌도 안되는 기득권이 소중했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어쨌든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자유민주주의국가이고 시장경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 사립일원화를 하고 고등교육에 대한 국가무책임화를 단행했어야 했는데 이때를 놓치고 나서 60년이 지나고 이제와서 바로잡을려고 하니 태산을 옮기는 것처럼 어려운 일이 되고 말았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제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는 일이다.
가정법이지만 해방 당시에 경성제국대학을 인수하는 과정에서 국립대학을 설립하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경성제국대학을 불하해 사립대학화했으면 그 결과가 어떨까.
비록 고등교육에 대한 수요가 폭발하고 있을지라도 과감하게 시장에 맡겼으면 우리나라는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적어도 지금처럼 우리나라 대학들이 세계무대에서 낙후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기업이 성공한 것처럼 대학이 못할 이유는 없기 때문이다. 초중등교육에 전념하고 고등교육은 시장에 맡기는 나라가 되었다면 노벨상은 몇 개쯤 갖고오지 않았을까. 왜냐하면 한국인의 재능은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것이기에. 또 고등교육을 시장에 맡겼다면 학벌의 출현은 분명이 없었을 것이라고 본다. 왜냐하면 국가의 배경을 갖지 않는 대학은 최소한 겸손한 대학일 것은 분명하니까. 시장에서 최선을 다해 1등대학이 되었다면 그런 대학은 비난의 대상이 아니라 존경의 대상이 될 것이다. 우리나라가 그런 대학을 갖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쉽다.
해방정국에서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안은 반대에 직면했었는데 관철시키기에는 무리가 있었지만 아쉬움을 남긴다.
경성제국대학 출신들이 친일파들인데 그들이 그대로 서울대학교에 남게 되면 친일파에 대해 청산이 되지 않음은 물론 일제시대와 마찬가지로 그들의 지배가 계속된다는 게 주 이유였다.
다 지난 일이기는 하지만 역사의 교훈이라도 얻기 위해서는 해방당시 논의가 분분했던 서울대학교 설립안 - 소위 국대안 -을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국대안과 그 반대운동의 이념적 성격을 교육체계와 관련하여 분석한 결과는 다음과 같이 정리되었다.
첫째, 국대안은 미군정기 교육정책의 기본방향 속에서 파악되어야 하는 것으로서, 미군정이 표방한 지배이념으로서의 반공이념이나 보수주의 정책과 무관할 수 없었다. 국대안은 당시 교육적 난제들을 해결하기위해 제기된 측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국립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시기인 독립정부 수립 이전에 제기되었다는 점, 그리고 현실적으로도 그 타당성이 미진했다는 점에서 사회적 지지기반을 결여하고 있었다.
둘때, 국대안에 내포된 현실적, 이념적 모순을 지적하면서 전개된 국대안 반대운동은, 초기에는 좌,우익을 초월한 교육운동의 성격을 뚜렷이 나타냈다가, 1947년부터는 좌,우익 정치세력의 대립상황과 맞물려 정치운동의 양상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셋째, 국대안 반대운동의 대항 이데올로기적 성격은 국대안 반대세력의 교육이념과 정치이념을 중심으로 이해되었다. 그 결과 국대안 반대세력의 교육이념은 그 명시적 주장에 있어서는 자주적인 교육, 학교운영의 민주화, 그리고 철저한 일제잔재의 청산으로 요약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들의 정치이념은 현실개혁적, 좌익적 성향의 정치이념이 혼재되어 있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것은 국대안 반대운동이 현실개혁적, 조직적 세력에 의해 주도되었다는 사실 때문에 국대안 반대운동을 좌익정치운동으로만 단순화시킬 수는 없다는 사실이다. 미군정기라는 역사적 특수성 속에서 전개되었던 국대안 반대운동은 당시의 교육체제 형성에 구조적인 영향력을 미치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대안 반대운동은 교육체제내의 비판적 세력들이 갖고 있던 교육적, 정치적 이념을 구체화시켰다는점에서 주목을 받을 만 하다.<최혜월의 연세대학교 석사학위 논문 -국대안 반대운동의 이념적 성격에 관한 교육사회학적 접근 초록- 중에서 1986.12>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을 반대한 자들이 대부분 사회주의자들인데 고등교육기관을 국가기관으로 설립하는 것을 반대한 것은 일종의 자기모순에 빠진 것이다. 지금도 사회주의자들은 고등교육을 국가의 이름으로 하기를 바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대안 반대자들이 국립서울대학교 설립을 반대한 것은 고등교육을 시장이 맡아야 한다는 것을 이해했기 때문이 아니고 친일파 청산, 자주교육, 민주화 등의 명분으로 사회주의제국을 건설하겠다는 다분히 정치적 구호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그들이 경성제국대학의 국립서울대학화를 반대한 것이지 지방국립대학설립을 반대한 것은 아니다.
한편 국대안을 수립한 자들도 모든 대학을 국립대학화하자는 것은 아니었다. 단지 경성제국대학을 국립대학화함으로서 국가가 요구하는 기예와 학술을 갖춘 인재를 스스로 양성해서 공급받고 싶어한 것으로 일본이 국립대학을 설립했던 이유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것이다. 물론 친일파가 온존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애써 귀를 막았다.
우리는 이처럼 우리나라 고등교육 체제를 정비할 수 있는 호기를 기득권을 인정하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좁은 시각으로 바라보기만한 것이다. 결과를 두고 말한다면 양측의 주장은 어느 정도 맞았다고 할 수 있다. 국대안반대론자들이 주장한 것처럼 경성제국대학 시절부터 형성된 기득권은 국립서울대학교를 거치면서 더욱 강화되고 국가의 배려속에 성장을 거듭해 국가학벌로 등극했다.
또 국대안을 수립한 군정측에서 주장한 거처럼 단기간에 국가가 필요로 하는 우수한 인재들을 국립서울대학교가 공급해 개발연대를 감당한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잃은 건 개발연대을 지나면서 비로소 알게된 고등교육의 전반적 낙후라는 안타까운 현실이다.
일제가 운용해온 국사립 이원체제를 보면서 이 땅에 똑같은 방식의 고등교육체제가 도입되고 해방과 건국 사이에 국대안 반대운동을 누르면서 우리나라 국립대학은 각도별로 설립된다. 고등교육 수요와 맞물려 국립대학과 사립대학들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난다. 그 중에서도 국립서울대학교는 장족의 발전을 이루면서 1974년도에 동숭동에서 관악산 기슭으로 이사를 가게 된다. 아마 서울대학교 관계자와 선배들은 좋아했겠지만 이때야 말로 우리나라 고등교육이 묘혈을 판 시기가 아닌가 한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기억하고 있겠지만 서울대학교 졸업식에서 총장의 축사를 뒤로 돌아서서 듣곤 했다. 이유는 여럿이 있겠지만 국가가 베푼 고등교육에 대한 고마움을 그렇게 갚아서는 안되는 게 아니겠는가. 자기 비용으로 고등교육을 받았다면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최고의 대학을 졸업했다는 자부심을 체제에 대한 거부로 표현했다. 국민의 세금으로 대학을 다니고서 한 행동들이 그랬다.
국립서울대학교가 관악산 기슭으로 이동한 것은 국립서울대학교 자체만을 두고 보면 하나의 축복일 수도 있다. 정통성이 취약한 군사정권이 최고의 에리뜨를 배출하는 대학에 호의를 베푸는 것은 이해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국가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는 그런 대학이 출현한다는 것은 대학이 권력의 경지로 승화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고 국가학벌이 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대학이 스스로 최선을 다하면 최고의 대학이 될 수 있다는 단순한 원리를 무시하고 국가의 권력이 동원될 때 나머지 대학들이 발전할 수 있을까. 한국사회에서 서울대학교를 능가하는 대학을 그대는 기대하는가.
서울대학교는 기회있을 때마다 정부로부터 벗어날려고 했다. 그건 비원悲願이 된지 오래다. 그 해법이 국립대학 법인화이다. 원래는 특수법인이 되기를 기대했는데 그것은 서울대학교만의 법인화를 의미했다. 지금도 서울대학교병원은 법인형태를 갖추고 있다. 서울대학교가 법인이 아니면서 그 부속기관이 법인인 셈이다. 지금 정부에서 추진하는 국립대학 법인화는 모든 국립대학의 법인화를 의미하기 때문에 특수법인이 아니다.
서울대학교가 1989년도에 연구 발표한 “국립대학의 특수법인화에 관한 연구”를 보면 그 목적과 필요성은 다음과 같다.
그 동안 정부차원에서나 또는 국립대학 자체에서 국립대학의 조직과 운영의 개선을 위한 노력이 꾸준히 전개되어 왔고, 이를 위한 연구도 계속 진행되어 왔다. 그러나 국립대학이 안고 안고있는 가장 기본적인 문제는 국립대학도 국가기관의 일종이기 때문에 정부 자체의 공통적인 법규와 지침에 따라야 하므로 교육기관으로서의 특수성을 살리지 못하고 정부로부터 획일적인 통제를 받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이다.즉 대학으로서의 자율적인 운영을 확보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점이다. 본연구는 이러한 문제의 인식하에 대학운영의 자율성과 능률성을 확보하는 방안의 하나로써 국립대학체제를 특수법인체로 전환하는 것이 바람직한가를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와같은 연구는 현재 여러방면에서 걸쳐서 민주화 자율화가 심도있게 논의되고 있는 시점에서 고등교육기관의 자율화를 위한 연구의 일환으로 그 의의와 중요성이 크다고 하겠다.<김동건, 선우중호 국립대학의 특수법인화에 관한 연구 1989. 서론부분>
정부는 2006년도에 국립대학 법인화안을 만들어 발표하고 공청회를 여는 것을 계기로 국립대학 법인화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다. 서울대학교도 자체적으로 세미나를 열고 의견을 수렴하고 있기는 하지만 조건을 많이 달아 속 뜻을 분명히 드러내지는 않고 있다. 전임 정운찬 총장이나 현 이장무 총장도 법인화를 지지한다고 발표한 바 있지만 교수협의회에서는 반대를 표명하고 있다.
국립대학 법인화는 국가기관으로부터의 이탈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 이유는 고등교육이 시장의 책임이어야 하고 국가는 시민들의 자기책임을 최대한 존중해야 한다는 민주주의 원리가 담겨있다. 또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시장과 경합해서는 안된다는 원칙도 담겨있다. 우리나라가 사립대학체제를 인정하지 않는다면 시장과 경합하지 않지만 사립대학체제를 두고 또 국립대학을 둔다면 자기모순에 빠지는 것이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서 국립대학의 법인화를 해야 한다면 당연히 대학의 운영자금도 자기가 조달하게 해야 한다. 사립대학과 아무런 차이가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법인화가 자율성을 제고시키기 위해서라는 명분은 성립하지 않는다. 법인화는 책임을 누구에게 지는가 하는데서 국가책임인가 아니면 법인책임인가를 논하기 위해서이지 자율성과 관계가 없다. 자율성은 운영자금을 누가 책임지는가와 관계가 있다. 만일 자기가 조달한다면 자율성이 보장되고 국가가 책임진다면 자율성은 보장되지 않는다. 그런데 법인화하면서 자율성을 제고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는 법인화한 대학에 대한 국고지원에 대해 자기가 조달한 것처럼 간주하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국가에 대해 책임지지 않겠다는 것으로 국민의 조세부담원칙을 침해하는 것이다. 이를 모를리 없는 국립대학들이 자율성을 부르짖으니 이해하기 힘들다.
국립대학을 법인화하고 국고지원을 중단해야 한다. 법인화하면서 국고를 지원할 명분이 없다. 무슨 이유로 국고를 지원할려 하고 대학측은 계속적인 국고지원을 기대하는가. 물론 일시적이고 급작스런 국고중단은 대학재정을 파탄에 이르게 할지도 모르고 따라서 그렇게 하자는 것은 아니다. 재정을 마련할 방도를 열어두어야 하고 그때가지 시간이 필요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국고를 지원하지 않는 법인화여야 하고 굳이 국고를 지원할려고 하면 법인화를 할 이유가 없다. 비국가기관화하면서 국고를 지원하는 것은 새로운 문제를 발생시킬 것이다.
Ⅱ. 국립대학의 법인화를 가능하게 하는 조건들
국립대학을 법인화해야할 이유는 많다. 그러나 이를 자세히 보면 절대적 조건과 상대적 조건이 있고 이를 나누어볼 필요는 있다. 흔히 효율성이니 공공성이니 하는 가치들은 상대적인 것들이고 절대적 가치를 부여할 수 없는 것들이다. 그러나 이런 절대적 가치들과 상대적 가치들이 혼재하는 혼란과 모순도 극에 달한 느낌이다. 따라서 이 기회에 국립대학의 법인화에 요구되는 조건들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1. 절대적 조건들
1) 고등교육분야를 국가고유업무로 볼 때 국민모두에게 그 혜택이 돌아가야 할텐데 이는 실질적으로 불가능하다. 고등교육분야는 어떤 경우에도 특정된 소수에게 혜택이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원하는 자 모두에게 고등교육을 국가의 이름으로 베풀수는 없는 일이다. 국민이 동의한다면 한정된 소수에게 고등교육을 국가의 이름으로 베풀수도 있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립대학이 허용되는 상황에서, 또 민주주의 시대에 국민의 절대다수가 동의하는 경우란 상상할 수 없다.
2) 고등교육이란 어디까지나 성인의 자유선택일 뿐이다. 국가가 나서서 누군가에게는 고등교육을 제공하고 누군가에게는 제공하지 않을만큼 세세한 부분까지 간여할 성질이 아니다. 그리고 국가란 그럴만큼 권위를 지닌 존재도 아니다.
3) 국가기관과 민간기관의 경합은 모순이다. 우리나라는 누구나 잘 알드시 고등교육 분야를 국가(국립대학)와 시장(사립대학)이 함께 맡고 있다. 마치 국가와 시장이 서로 보완관계이고 협력관계이기나 한 것처럼. 그러나 실제는 어떤가. 국가기관으로서의 국립대학들이 전국적으로는 국립서울대학교가 지방단위로는 지방소재국립대학들이 한결같이 절대우위체제를 점하고 있는 현실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국가는 어떠한 경우에도 사인과 경합할 수 없다. 오직 소송의 당사자로서 국가가 사인과 경합할 수 있을 뿐이다.
4) 고등교육은 국가의 고유업무가 아니다. 이런 문제는 민간이 고등교육을 수행할 능력이 없을 때 그리고 국가만이 그런 능력을 감당할 수 있었을 때는 덮혀져 있었다. 우리의 현대적 의미의 고등교육은 일제시대에 열렸는데 일본제국은 명치유신 후에 곧바로 국립대학 설립에 들어갔다. 동경제국대학의 설립이 그 효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얼마 후 민간에도 대학설립의 기회를 주어 조도전 대학 등 많은 민간대학들이 설립되었다.
이는 일본제국이 고등교육분야를 국가의 고유업무로 파악하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해방 후 국가건설에 매진하던 시절과 그 이후에도 이런 문제에 대해 심도있게 논의되지 않은 것은 불행한 일이다. 백보를 양보해 경제재건이 급선무였다고 할 지라도 어느 정도 국가가 안정되고 경제성장의 기반을 다진 후에는 고등교육의 국가고유 업무여부를 논의했어야 한다. 그리하여 고등교육에 대해 전적인 무책임화를 단행했어야 했다고 본다.
5) 고등교육에 대해 국가와 민간이 함께 참여한다는 것은 모든 대학에 대해 일관된 관점을 유지해야 한다는 원칙에 위배된다. 언제나 국가는 고등교육기관에 대해 동등한 정책을 유지해야 한다. 특정대학을 배려한다는 것은 그에서 배제된 대학에 대해 불이익을 안겨주는 것으로 대학사회에 대한 국가에 의한 인위적 서열을 조성하는 것이다.
6) 고등교육분야는 통제의 대상이 아니다. 이유는 대학이 학문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중등교육처럼 민주시민의 자질을 갖추게 한다든가 개인의 인격 성장에 기여한다는 역할이 아니라 말 그대로 학문을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학문이란 진리를 탐구하는 것을 말한다. 어떻게 하면 진리를 탐구할 수 있을 것인가. 헌법은 이를 보장하기 위하여 학문의 자유라는 조항을 두고 국민의 기본적 권리로 인정하고 있다. 이는 국가가 학문의 자유와 이를 목적으로 하는 고등교육기관설립을 보장한다는 것을 뜻하지 국가가 스스로 학문의 자유와 고등교육기관을 운영해야 한다는 것을 뜻하는 것은 아니다.
2. 상대적 조건들
1) 효율성
국립대학의 법인화 논의는 국립대학들이 국가기관이고 조직원이 국가공무원이기 때문에 생길 수 있는 비효율과 비능률을 제거하고 민간조직과 같은 수준으로 법적 지위를 전환시켜 상황변화에 적절히 적응시키고 독립채산제를 도입해 자기책임의 원리를 도입하고 재직원의 신분도 민간신분으로 전환시키자는 것이 명분이다. 그것이 세계화시대에 대학이 살아남을 길이라는 것이다. 이런 논의는 효율성과 능률성을 제고하는 것이 목적이지만 민간기구화한 법인이라고 해도 그를 보장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상대적 선택의 문제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국립대학이 반드시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판단이 성립하지 않는다는데서 더욱 그렇다. 원래 효율성이니 능률성이니 하는 것은 현상황의 존재를 긍정하고 문제점만을 개선하자는 것으로 개혁보다는 낮은 단계의 혁신이라고 할 수 있다.
정부에서 국립대학 법인화 논의의 핵심으로 삼는 것이 이사회구성과 총장에 대한 선출문제인데 이는 법인화가 반드시 효율성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미리 대비하는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국립대학의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 법인화해야 한다는 주장은 도대체 누가 한 것인가. 학교법인인 사립대학들은 모두 국제경쟁력이 있다는 말인가.
2) 공공성
흔히 교육의 공공성을 말한다. 이를 위해 국가는 초중등교육의 국가의무화를 선언하고 그의 실현을 위해 진력하고 있다. 그러나 고등교육에 대해서도 공공성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데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즉 초중등교육의 국가책임은 절대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고등교육에 대해서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고등교육이란 기본적으로 고급지식을 의미하고 그런 지식을 누구나 갖출 수는 없는 일이다. 만일 있다면 그런 건 고급지식일 수가 없다. 고등교육이 고급지식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것이라면 어짜피 대중성과는 거리가 멀 수 밖에 없다.
공공성이란 그 의미가 쉽게 접근할 수 있고 가격이 싸다는 의미 이상을 벗어날 수 없지 않겠는가. 고급지식을 생산하는 고등교육이 쉽게 접근하고 가격이 싸야 한다는 것은 필요에 의해서 일하고 원하는 만큼 얻을 수 있다는 구호처럼 달콤하기는 하지만 실현될 수는 없는 것이다. 만일 그것이 실현된다면 다시 그 이상의 고급지식을 생산하고 분배하는 교육기관이 생겨날 것이다. 그랑제콜처럼. 그리고 MBA처럼.
교육의 공공성은 초중등분야에 한정되어야 하고 국가의 예산도 초중등교육에 집중되어야 한다. 고등교육의 공공성은 국가의 시장에 대한 감시자 역할이면 충분하고 누구에게나 고등교육을 받을 기회가 주어진 이상 집행자로서의 짐을 훌훌 내려놔야 한다고 본다. 80%의 사립대학들이 있는나라에서 고등교육 접근기회는 충분히 주어져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싼 비용의 고등교육이란 모순을 담은 말이라고 보여진다.
Ⅲ. 고등교육체제 개혁은 국립대학의 법인화를 의미하는가
그동안 고등교육체제를 개혁해야 한다는 주장들이 많았는데 그 아이템을 보면 교수의 질을 높이기 위해 외국의 교수들을 초빙한다든지 수업을 영어로 한다든지 교수의 정년을 줄인다든지 하는 자질구레한 것들이 많았다. 그러면서도 국립대학들은 국고의 전폭적인 지원을 늘 요구하고 있고 사립대학들은 등록금의 자율화나 기여금입학제의 도입 등을 주장하고 있다. 국사립대학을 막론하고 정부의 규제 축소를 주장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런 요구들은 아주 오래된 것들이고 시정이 잘 안되는 걸 보면 주장에 힘이 실리지 않았거나 실현불가능한 것을 주장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가운데 유학러시가 일어나고 있다. 외국에서는 다 쓰러져가는 대학이 한국학생들로 인해 활력을 되찾고 있다는 말도 들린다. 우리 대학에 대한 실망이 유학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그런가 하면 지방소재 사립대학들은 폐교를 우려해 비명을 지르고 있지만 온갖 규제를 다하던 당국은 갑자기 자기책임이라고 하면서 나몰라라 하고 있다. 시장에서 살아남기 위해 노력하든지 폐교하든지 알바 없다는 투다.
폐교할 때 폐교하더라도 지방소재 대학끼리 당당하게 경쟁한번 하게 해주는게 어떨까. 무슨 말인가 하면 지방은 지방대로 지방소재 국립대학들이 국립이라는 모자를 쓰고 앉아 공정경쟁을 훼손하면서 독야청청하고 있다. 지금은 서울에 소재하는 사립대학들이 서열상위에 올라 위기의식을 느끼지만 지방소재 대학끼라 공정하게 제스스로의 능력으로 경쟁할 의지는 조금도 없어 보인다. 있다면 당장 국고에 대한 기대를 버려야 한다. 그리고 운영자금을 스스로 조달하는 노력을 해야 한다. 사립대학이 그렇게 해왔드시.
고등교육이 국민의 신뢰를 잃어가고 있다. 국사립을 막론하고 그렇다. 기업이나 일반사회에서도 대학이 인재를 키우지 못하고 있다고 불만이다. 그러나 해법이 논의의 수준에서 맴돌 뿐이다. 한 나라의 발전이 고등교육에 기초한다면 문제의 본질을 바로 보고 서둘러 대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필자는 우리나라 교육체제가 일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늘 생각해오고 있다. 일본을 넘어 미국을 보아야 한다. 미국의 초중등교육의 국가책임만큼 우리도 국가책임정도를 높혔으면 한다. 미국은 95%의 초중등학교가 공립학교이고 단순학제를 운영한다. 우리나 일본처럼 사립중등학교의 비율이 높지도 않고 복선제 학제를 운영하지도 않는다. 이유는 국가책임을 명쾌하게 하고 초중등교육의 보편교육을 실현하기 쉽게 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고등교육에 대해서는 무책임으로 일관하고 있다.
물론 고등교육기관을 위한 연구과제별 기금은 최대한 조성해 대학에 제공하지만 그게 운영자금은 아니다. 우리나라는 운영자금을 자동으로 국립대학에 지원하고 있다. 이는 국가에 의한 특혜라는 말 아니고 다른 말로 표현할 길이 없다. 이제는 사립대학도 충분히 인재를 배출할 능력이 있다. 굳이 국립대학이 있어야할 이유가 없지 않는가.
그렇다면 무엇보다도 그런 특혜를 없애야 한다. 그리고 사립대학들이 발전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어야 한다. 그것은 매우 쉬운 일이다. 국립대학에 주는 특혜를 없애기만 하면 된다. 시간은 물론 필요하지만 당위차원에서 하는 말이다.
이 모두는 일본의 교육체제 속에서는 찾아지지 않는다. 미국을 보자. 누군가는 프랑스나 독일처럼 유럽을 보자고 한다. 그러나 그런 나라들이 세계학문을 주도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이미 상식에 속한다. 비록 고등교육이라는 수요를 채워주는 복지국가로 가야 한다고 말을 하고 있지만 유럽의 국가들이라고 해서 교육복지 수준이 더 높다고 할 수도 없다. 물론 대학이 입학한 자들에게는 교육복지가 돌아가지만 그 비율이 아직도 고교졸업생의 40%를 겨우 상회할 정도이다.
우리나라는 이미 졸업생 중 대학교육이수 희망자가 90%를 넘고 그 중 실제로 대학에 입학하는 자도 90%를 넘는다. 다시 말해 우리나라나 미국은 세계 최고의 대학진학율을 보이고 있는 나라이고 그런 의미에서 유럽국가들보다 더 높은 교육복지를 시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물론 자기비용이란 문제가 있지만 고등교육기회를 획득한다는 측면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일본이 120년만에 최대의 교육개혁에 착수한 게 국립대학을 정부기구에서 배제시키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 중요성을 알 수 있다. 우리에게도 많은 대학개혁 과제가 있을 수 있지만 더 이상 국립대학을 운영하지 말고 국가의 교육에너지를 초중등교육에 집중했으면 한다. 초중등교육에도 할 일이 얼마나 많은가. 이를 해결하기에도 바쁜 정부가 고등교육을 일부(20%)나마 움켜쥐고 있을 이유가 무엇이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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