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나는 세상에서 제일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 2년 전 자살했던 우리나라에서 제일 잘 나가는 기업 회장의 막내 딸 있잖아, 그 사람이야.”
올해 중3인 우리 집 큰 아이가 하는 이야기다. 2년 전에 있었던 일을 지금도 가끔 이야기 하는 것을 보면 우리 아이에겐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자신이 정말 갖기를 소망하는 모든 조건 - 원하는 모든 것을 다 해줄 수 있을 정도의 부를 갖춘 부자 아빠, 국내 명문 대학 출신에 미국 유학 생활 - 을 갖춘 사람이 뭐가 부족하고 뭐 그렇게 힘들어서 자살을 선택했는지 그로서는 이해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리고 당분간도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아이들은 모르지만 어른들은 다 아는 것
하지만 어른들은 다 안다. 사람들이 행복을 줄 수 있다고 믿는 모든 외적인 조건을 다 갖춘 것처럼 보이는 사람에게도 죽음을 생각할 정도로 한계 상황에 직면케하는 고통이 다 있다는 것을. 그리고 이러한 고통은 일정한 시기만 지나면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각 시기마다 주어지는 고통의 분량이 있으며 이후의 고통이 그 이전의 고통보다 결코 작지 않다는 것을. 또 우리가 인생의 한 영역에서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싸운다고 해서 인생의 다른 영역에서 마땅히 당해야할 고통이 면제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물론 인생에 고통만 있는 것은 아니다. 도무지 지나갈 것 같지 않은 고통도 끝이 있으며, 고통 가운데도 우리를 미소짓게 하는 잔잔한 기쁨이 주어지기도 한다. 때로 하나의 고통과 또 하나의 고통 사이에 평화가 한 동안 지속되기도 하고, 고통의 시간 동안 길러진 내공으로 인해 고통 가운데 숨겨진 축복의 비밀을 누리기도 한다. 그리고 때로 우리의 노력의 결실의 기쁨, 또 때로는 우리 노력과 허물을 넘어선 은총의 열매가 주어지기도 한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공존함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본질이 고(苦)임은 부인할 길이 없다.
겨우 겨우 우째 우째
40대에 접어들면서 부산했던 20대 후반과 30대를 돌아볼 여유가 약간 생겼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조금 자라준 덕분에 생긴 여유가 아닌가 싶다. 20대 후반 결혼과 동시에 아내와 맞추어가는 버거움을 제대로 감당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첫 아이가 태어났다. 그리고 2년 터울로 4명의 아이를 낳았으니 장모님으로부터 “너희는 지성인이라는 사람들이 왜 그러냐?”는 소리를 들을 만도 했다. 비록 아내가 첫 아이 출산과 함께 전업주부로 헌신을 하긴 했지만 주변의 도움 없이 부부의 힘만으로 2년 터울의 4명의 아이를, 그것도 시골에서 방목하는 것이 아니라 도시에서 일일이 돌보며 키운다는 것은 두 사람을 소진시키기에 충분한 상황이었다. 거기다가 첫 아이를 낳는 시점과 비슷한 시기에 발을 들여놓은 기독교사운동은 갈수록 확장되었고 고민과 헌신의 분량을 점점 더 많이 요구했다. 같은 시기 교회에서의 헌신과 요구도 교회의 본질과 방향에 대한 고민과 맞물려 고통스럽게 진행이 되었다.
“겨우 겨우 우째 우째” 라는 그 시기 내가 썼던 글의 제목과 같이 정말 한 치의 여유 없이 이리 뛰고 저리 뛰고 여기 메우고 저기 메우며 살았다. 만성수면 부족에 아플 여유도 없이 뛰어다녔음에도 아내와 아이들, 학교와 학생들, 교회, 좋은교사운동 각각에 대해서 다 충실하지 못한 죄인이었다.
고통보다 더 힘든 것, 권태
그렇게 정신없이 살 때도 가끔 생각했던 것이지만 이렇게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를 약간 넘긴 지금에 와서 많이 생각하는 것은 ‘왜 하나님은 20대 후반 30대라는 그 좋은 젊음의 시기에 이렇게 정신없이 허덕이며 살게 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완전히 정리된 생각은 아니지만 하나님이 그 혈기왕성하고 욕망이 강한 그 시기에 육체적으로 감당하기 힘든 일들과 바쁜 일정들 가운데 수고의 용광로에서 연단시키고 그 시기를 무사히 지나가게 하신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이러한 생각은 육체적으로 힘든 시기를 약간 넘겨 인생에서 어느 정도의 성취와 여유를 갖게 된 내 또래 친구들의 삶을 보면서 더 강하게 하게 된다. “인생은 고통과 권태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한다.” 라고 했던 쇼펜하우어의 말처럼, 우리는 인생에 극심한 고통이 주어질 때 이 고통이 빨리 지나가기를 바라지만, 고통이 지나가고 나면 평안과 평화가 오는 것이 아니라 ‘권태’가 찾아온다. 그리고 이 권태의 시기는 강한 본능과 죄의 유혹을 동반한다. 특별히 아이를 적게 낳아서 빨리 키워 육아의 고통에서 비교적 빨리 벗어나고, 부모님로 물려받은 유산 혹은 본인의 노력을 통해 빨리 사회 경제적 안정을 누리고 있는 친구들의 경우 다른 사람보다 빨리 찾아온 이 권태의 유혹을 이기기 너무 힘들어 하는 것을 많이 본다. 거기다가 젊음의 혈기와 욕망이 많이 남아있고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 경제적인 재화가 넘쳐날 때 여기에서 오는 온갖 죄악의 유혹과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타락의 열린 길을 이겨내기란 여간 힘든 것이 아닌 것이다. 특히나 가치상대주의와 개인의 사적 생활에 대한 불간섭의 경향은 죄와 싸워 이기거나 자기를 쳐 복종시키는 내공을 쌓지 못한 현대인에게 큰 구실이 되어 버린 상황이다. 가끔 매스콤에 보도되는 권력과 상류층의 타락은 권태에 굴복단한 우리 시대의 자화상을 잘 드러내 준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
군대에 처음 들어가면 누구나 편한 보직을 원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 편한 보직은 그에게 복이 아니라 재앙인 경우가 대부분이다. 오히려 훈련에 작업에 내무 생활에 정신을 차릴 수 없을 정도로 바쁜 생활이 군대에서의 2년이란 시간 뿐 아니라 인생 전체에 매우 유익함을 군대 생활을 제대로 한 사람들은 다 고백하는 말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각 시기마다 우리가 감당해야할 숙제들을 다 주셨다. 물론 이 숙제들은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 능력 이상으로 너무 벅차게 보이고 나의 모든 밑천을 드러내고 젖 먹던 힘까지 소진하게 하는 것들이다. 하지만 우리의 본성과 체질을 가장 잘 아시는 주님은 이 정도의 벅찬 숙제를 가지고 끙끙거리는 것이 우리의 죄악된 자아를 낮아지게 하며 우리의 육체적 소욕을 떨쳐버리고 영원한 것에 대한 소망과 이웃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는 성숙으로 나아갈 정도의 적당한 분량으로 주신 것이라는 믿음이 필요하다.
참 평안은 어디에?
아무도 고통을 당하기를 원하지 않고 누구나 지금 주어진 고통도 빨리 지나가길 원할 것이다. 하지만 고통을 피해 달아난 또 다른 곳에는 평화와 평안이 아닌 권태가 우리가 기다리고 있으며, 이 권태는 고통보다 훨씬 감당하기 어려운 적이라는 현실을 직면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수많은 선배들이 고통의 상황이 아닌 권태의 상황에서 무너졌고, 지금도 우리의 동료들이 권태의 상황에서 죄와 본능의 나락으로 어이없이 떨어지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우리 영혼이 진정으로 원하는 참된 평화와 평안은 고통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내게 주어진 인생의 숙제와 이해할 수 없는 고통을 정직하게 붙들고 힘에 겨운 수고를 하는 가운데 주어진다. 이 힘겨운 수고 가운데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새기며,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몫과 한계를 받아들이며, 하나님이 인생에게 요구하시는 ‘인내’의 분량을 채우고,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사는 것이 내 정체성의 핵심이 될 때 비로소 찾아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찌하든지 네게 주어진 고통을 벗어버리고 본능과 쾌락을 따라 나아가라는 세상의 유혹을 벗어버리고, 좀 어리석어 보이더라도 내게 주어진 고통과 숙제를 묵묵히 감당해가는 가운데 그리스도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걸을 일이다. 그것이 참 지혜자의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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