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것이 바로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아이를 키우다 보면 그 아이의 모습 속에서 나를 발견할 때가 종종 있다. 특별히 내가 정말 싫어하는 나의 모습, 그래서 애써 극복하려고 노력해서 이제는 사람들에게 잘 드러나지 않을 정도로 극복해냈던 모습을 아이에게서 볼 때 너무 화가 난다. 그래서 애써 감정을 누르면서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런 모습을 벗어나야만 하는 이유와 벗어날 수 있는 방법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지만, 사실 나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그 아이가 그런 연약성을 벗어버리고 참 자유함과 강함을 입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하나님의 특별한 개입하심과 만져주심이 아니면 아이 자신의 힘쓰고 애씀으로는 되지 않음을. 그리고 어쩌면 그의 그 연약함은 그가 일평생 하나님 앞에서 감당해야만 하는 짐일지도 모른다는 것을.
살아가면서 크고 작은 모임이나 기관의 지도자급에 있는 사람들의 연약함과 부딪힐 때가 있다. 특별히 그 자리에 있을만한 역량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음으로 인해, 자신은 나름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지만 실제로 일은 제대로 추진하지 못함으로 인해 여러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고 그 모임이 제대로 사명을 감당하지 못하게 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의 자리와 그 자리에 있는 자신의 체면에 집착해 일을 그르치는 사람을 볼 때 분노를 느끼게 된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나는 그 사람을 너무도 잘 이해한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모습이 바로 나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그 사람의 그런 모습이 너무도 내 눈에 잘 띄고, 한편으로 이해를 하면서 동시에 더 깊게 분노를 하게 된다.
우리는 모두 과정 속에 있다
이전에는 선과 악이 분명히 구분되고, 이 세상에 선인과 악인이 따로 존재하는 줄 알았다. 물론 형이상학적 실체로서의 선과 악은 분명히 구분될 것이다. 하지만 최소한 인간 안에서는 선 속에 악이 있고, 악 속에 선이 함께 있다. 우리가 선을 붙들고 악과 싸우지만 사실 우리 속에도 악이 같이 있고, 우리가 싸우는 그 악인 가운데도 일말의 선한 것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인간이 아무리 선을 붙들고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연약함으로 인해 그 선을 악한 방법으로 휘두를 수도 있고, 그 선한 싸움의 유탄으로 악이 발생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 한 가지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은 인간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가 악인과 싸울 때, 싸움의 편의를 위해 그 악인을 나의 경험을 바탕으로 한 가지 모습으로 고정시켜놓고 싸운다. 내가 설정한 그 모습이 그 사람의 실체일 수도 있고, 좀 과장된 모습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그렇게 고정시켜놓아야만 내 싸움의 정당성과 동기가 식지 않는다. 하지만 불행히도 상대방은 끊임없이 변하게 마련이다. 그는 내가 선의 이름으로 공격하는 그 공격을 받고 자신의 악을 고쳐나가는 경우가 많다. 동시에 나 역시 고정되어 있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 내가 상대방의 악과 싸우기 위해 마음을 강하게 하는 동안 나도 모르게 나의 마음이 굳어버리고 그것이 또 하나의 우상이 되어 악하게 되어가는 경우가 많다.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니체는 “괴물과 싸우는 자는 괴물이 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대가 심연을 굽어볼 때, 심연 또한 그대를 들여다본다.(Whoever fights monsters should see to it that in the process he does not become a monster. And when you look long into an abyss, the abyss also looks into you. BGE 146)”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는 쉬지 않는다
인간의 본성과 연약성이 이렇게 복잡할진대 이러한 인간과 인간사를 다루시는 하나님의 손길도 결코 단순하지가 않다. 그래서 많은 경우 하나님이 이 땅의 악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울부짖는 선인의 수고와 기도에 대해 쉽게 응답하지 않으시고, 악인의 번창을 허용하시고 선인은 오히려 오해를 받고 수치의 구덩이에 빠뜨리시는 것 같이 보이기도 한다. 악인의 큰 악에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으면서 선인의 지극히 작은 실수에 엄격하게 반응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 분의 깊은 보좌 앞으로 나아가 그 분의 영광과 지혜의 빛을 약간이라도 맛보기만 한다면 그 분은 침묵하거나 가만히 계신 것이 아니라 슈퍼컴퓨터보다 훨씬 더 복잡한 하나님의 지혜 속에 60억 인구를 다 계산에 넣으시고, 그 한 사람 한 사람의 처한 상황과 그 은밀한 마음까지 다 고려하시며, 각 사람의 향한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이루시고, 당신의 가장 선하시고 공의로우신 사랑을 펼치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 분은 결코 침묵하거나 쉬지 않으시며, 한 가지 사건을 통해서도 60억 명에게 60억 가지 이상의 말씀을 하고 계시며, 그 복잡한 모든 얽히고설킨 선과 악의 문제를 풀어내고 계심을 알 수 있다.
그의 선하시고 온전하시고 기뻐하시는 뜻
하나님의 이 광대하심과 지혜의 크심에 대한 깨달음은 결코 우리를 무기력하게 하거나 불가지론에 빠지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온전하심에 비할 때 인간은 모두가 다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도 판단할 수 없다는 식의 모호함으로 우리를 빠뜨리지 않는다. 오히려 선과 악에 대한 우리의 지각과 판단을 더 분명하게 해 준다. 다만 우리가 싸워야 할 악이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님을 분명하게 인식하게 해 준다. 이 땅 가운데 악인과 싸우고, 지도자의 연약함과 싸우고, 악한 구조와 싸울 때도 그 악하고 약한 사람에 대한 하나님의 긍휼과 나를 통해 그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의도를 놓치지 않게 된다. 악을 향한 나의 싸움이 악을 멸할 뿐 아니라 그 악에 사로잡힌 자를 구원하고자 하는 하나님의 도구임을 알게 된다. 그러하기에 악과 싸우면서도 악인을 진심으로 불쌍히 여기고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게 된다.
동시에 하나님은 악과 싸우는 그 상황을 통해서 나의 연약함과 악함을 다루는 일도 함께 하고 계심을 인식하게 된다. 그러기에 거대한 악 앞에서 너무도 작고 보잘 것 없으며 여전히 약함에 떠는 나로 인해 절망하지 않으며, 오직 하나님의 도구로서 하나님을 의지해서 일하며, 사랑의 동기로 일하며, 그 싸움을 싸울수록 더 겸손해지고 더 거룩해지며 더 여유로워지게 된다. 나를 향한 상대방의 공격과 모략으로 인해 마음이 약해지거나 분노에 침몰하지 않고 오히려 그 속에서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지금 상황 가운데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한 뜻이 무엇인지를 구할 수 있게 된다.
하나님의 지혜에 이르도록
매일 매일 부딪히는 우리의 일상 뿐 아니라 가장 복잡하게 보이는 이 세상 모든 구조에 이르기까지 깊게 들어가 보면 결국 ‘인간’이 있고, 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속성은 ‘약함’과 ‘악함’이다. 그리고 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 속에 있는 이 ‘약함’과 ‘악함’이 다양한 방식으로 결합하여 모든 인간과 사회의 문제와 고통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우리는 이로 인해 괴로워하고 또 때로 싸우며 살아간다. 이것이 우리 인생의 본질일진대, 우리는 이 모든 인간의 ‘약함’과 ‘악함’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지혜에 이르기를 힘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지혜를 살아내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이 땅 가운데서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고 불리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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