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개혁이 안되는 이유 1
언어는 세계를 보는 창이라고 했던가. 이 말은 만일 우리가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다면 세계를 볼 수 없다는 말임과 동시에 언어가 사물을 정확히 비추지 못할 경우에도 세계를 바로 보지 못할 것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필자는 우리나라 교육이 개혁되지 않는 이유 중의 하나로 우리가 사용하는 교육용어가 교육현실을 정확히 비추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오고 있다. 만일 교육용어가 교육현실을 정확히 비추어주기만 한다면 지금처럼 교육이 얽혀있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다.
우리는 교육개혁을 해야한다는 말을 사용한지 20년이 넘었다. 노태우정권에서 교육개혁심의회를 구성했었으니까 교육개혁의 필요성을 느낀지는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교육개혁을 논하고 있으니 사실상 교육개혁이 지지부진하다는 반증이 되기도 할 것이다.
물론 일부에서는 교육개혁이 필요없다거나 교육개혁이 이미 되었다거나 가벼운 정도로 보완하면 되지 요란하게 교육개혁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견해도 있을 수 있다. 아마 그래서 교육개혁이 답보상태에 있는 건지도 모를 일이다. 여하간에 필자는 교육개혁이 되어야 한다고 보는 입장이고 그런 입장에서 안되는 이유를 찾아보고자 한다. 교육개혁이 되어야 하는 이유는 여기서는 다루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교육개혁이 안되는 첫째 이유로 교육언어의 부정확한 사용을 들고 싶다. 교육개혁적 용어들이 부정확하게 사용된다면 그런 용어들이 교육현실을 왜곡되게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용어들 중 <입시>, <평준화>, <학벌주의>에 대해서 먼저 검토해보고자 한다.
사람들은 <입시>라는 말을 스스럼없이 사용하는데 그 의미는 대학입학제도를 지칭하는 것이다. 그런데 대학입학제도와 입시는 차이가 있다. 대학입학제도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한 절차를 의미하지만 입시는 그런 절차 중의 특이한 한가지 형태를 나타내는 용어일 뿐이다. 다시 말해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공개적으로 시험보아 그 성적으로 대학에 진학하는 경우에만 사용할 수 있는 말이다. 만일 대학에 입학하는 절차에 공개경쟁시험이 없고 그 성적에 따라 대학에 입학하지 않는다면 그래도 대학에 입학하는 것을 <입시>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아주 쉬운 예로 <미국의 입시> 운운하는데 미국에서 대학에 입학하는데 공개경쟁시험이 없는 이상 입시라는 말을 사용해서는 안된다고 보는데 자꾸 <미국의 입시>운운하고 말하니까 미국에서 대학에 진학하는데도 시험이 있는 걸로 오해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에 미국에서 대학을 이수한 사람들을 많이 만날 수 있는데 그 누구도 공개경쟁시험을 본 적이 없고 점수와 석차도 본 적이 없으며 시험본 날자도 없고 장소도 없고 시험문제지도 본 적이 없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입시가 있다면 그럴 리가 없는 일이다.
이처럼 입시제도가 없는 미국의 대학입학제도를 자꾸 <미국의 입시>라고 표현하고 우리의대학입학제도도 <입시>라고 표현함으로서 대학입학제도를 바로 볼 수 없게 하는 언어의 부정확한 사용은 결국 우리나라 대학입학제도의 개혁을 어렵게 하고 있다는게 필자의 생각이다.
둘째로 <평준화>에 대해서인데 우리나라는 68년도에 중학교 평준화를 시행했고 74년도에 고등학교 평준화를 시행했으며 한동안 평준화는 크게 문제시되지 않았는데 언제부터인가 평준화가 도마위에 올랐다.
평준화가 의미하는 바는 두가지로 갈리는데 하나는 시설의 평준화이고 다른하나는 실력의 평준화이다. 68년도와 74년도에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평준화시킨 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시설의 평준화이다. 공립학교간의 평준화는 도시와 시골의 균등화를 추구한 것이고 공립과 사립간의 평준화는 사립학교에 대한 지원으로 해결했다. 그러니까 도시건 시골이건 공립이건 사립이건 중학교는 중학교대로 고등학교는 고등학교대로 시설과 교원의 보수를 균등화했다. 이것이 평준화인데 어느 틈엔가 평준화가 실력의 평준화로 전이되었고 그 후에는 실력의 상향평준화니 하향평준화니 하면서 다투고 있다.
학교공부에서 실력의 평준화란 성립하지 않는다. 예컨대 모두에게 똑같이 천자문을 가르쳐도 실력이 들쑥날쑥하는게 학교 공부다. 누구는 하나를 가르쳐도 열을 알고 누구는 열을 가르쳐도 하나밖에 모른다. 공부란 그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 교육이 평준화덫에 걸려 국가경쟁력이 퇴보하고 있다는 트집아닌 트집으로 평준화를 허물려고 하고 있다. 그것은 교육과정의 획일적 운영을 말하는 것이고 그런 점을 비판해야지 시설평준화를 허물어서야 말이 되지 않는다.
모두다 세금을 내는 국민의 이세라고 한다면 그리고 국가에서 준비한 시설에서 교육받게 한다면 시설기준이 같거나 비슷해야 맞지 지나치게 시설에서 차이가 나서는 안된다. 도시와 시골의 차이가 없어야 함은 물론이지만 국공립과 사립사이에도 지나치게 차이가 나서는 안된다. 사립중고등학교가 국가의 지원을 받지 않는다면 국공립학교와 시설에서 차이가 나도 문제가 되지 않지만 국가의 지원을 받으면 국사립간에 같거나 비슷해지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사립중고등학교 시설이 국공립만 못한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해 국가가 금전적 지원을 하면서 평준화를 시행했지만 강제성을 띈 점이 있어 내내 불만이 쌓인 것처럼 평준화해제론자들은 말하고 있지만 이제라도 국고지원을 받기로 하면 국공립과 시설에서 평준화를 이루고 받지 않기로 하면 차이를 인정하는 방향으로 나가야 할 것이다.
이때 중등교육의 (실력의) 평준화 운운해서는 안되고 국가의 책임과 권한 범위내에 들어오면 (시설의) 평준화를 유지하고 그 범위내에 들어오지 않으면 사립 독자의 길을 모색하게 하면 된다. 괜히 <평준화>를 탓하고 그를 허물자고 하는 것은 중등교육에 대한 국가의 역할을 바로보지 못하게 할 뿐이다.
셋째로 <학벌주의>란 용어도 심히 왜곡된 용어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필자는 지난 11월 22일 저녁 12시 YTN 시사프로에서 기자와 뉴스진행자가 스스럼없이 <학벌주의>라는 말을 사용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학벌주의>라는 말은 학벌을 중시하는 사고의 흐름이나 경향을 말하는것 같은데 이처럼 부정확한 용어가 있을 수 없다. 학벌이란 사회학적 용어로 권력을 의미한다. 좀더 정확하게는 학연을 매개로한 특정한 비공식적 특정세력으로 국가의 교육적 중요정책결정에 영향력을 행사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 권력에 주의라는 말이 어떻게 부가 될 수 있는가. 권력은 그 자체가 권력이지 권력을 중시하는 사고의 흐름이나 경향을 지칭하지 않는다. 권력을 중시하는 흐름이나 경향은 (니이체의) 권력의지 정도로 표현하면 그만이다.
우리는 특정 군인그룹이 정치를 좌지우지 할 때 <군벌>이라고 부르지 <군벌주의>라고 부르지 않았다. 또 특정 자본가 그룹이 정치에 영향을 미칠 때 그들을 <재벌>이라고 했지 <재벌주의>라고 표현하지 않았다. 권력은 그 자체로 완성된 용어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벌주의>란 말은 어디서 연원해서 튀어나온 말인지 알 수가 없다. 아마도 학벌이라고 표현해 우리나라에 엄존하고 있는 특정 국가학벌의 눈총을 받기 싫어 사고의 흐름이나 경향을 나타내는 <...주의>라고 표현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처럼 현실을 부정확하거나 왜곡되게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게 되면 결국 학벌사회의 문제점을 제대로 보지 못하게 되고 나아가 학벌사회 속에 포박당하게 되고 말 것이다.
우리는 <입시>라던가 <평준화>라던가 <학벌주의>라는 말을 일상중에 무의식적으로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것은 그만큼 교육현실을 바로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오는 것이고 교육개혁을 힘들게 하는 것이다. 용어의 정확한 사용이 교육개혁의 첫걸음이라고 감히 주장하는바이다.
학벌없는 사회만들기 대표 이공훈
원문: http://cafe.daum.net/no-worry/3FW6/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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