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2012년 9월-10월 두달동안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선행교육금지법 제정을 위한 성찰과 고백의 광장, 시민 문화제>에서 낭독된 글입니다.
서울에서 잘 살다가 느닷없이 시골로 가서 농사를 짓겠다고 했을 때 주위 사람들이 가장 많이 한 말은, 농사경험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먹고 살려고 하느냐는 염려보다 ‘아이들 교육은 어쩌려고 그러느냐’는 말이었어요. 아이들을 위해 서울로 도시로 나오려고 하는데 거꾸로 시골로 간다고 하니 이해하기 어렵다는 거지요. 저는 마땅히 할 말이 없어서 “아이들 교육을 위해서 갑니다”라고 말을 했어요.
친구가 옥상에서 떨어져 그 따스한 봄날에 꽃잎을 떨구고야 마는 일이 일어나도 “그래서 어쩌란 말이야.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야” 차가운 눈빛으로 다시 책장을 넘기는 이 나라 교육에서, 내 자식만큼은 저 좁은 문을 향해 달려가게 하는 맹목적 행렬에서 벗어나게 하고 싶었지요.
그렇게 200년 넘은 다 쓰러져가는 집에서 시작한 경남 합천 노인분들만 남은 외딴 마을에서의 시골생활. 50여명의 작은 학교가 좋았지만, 긴밀히 연결된 조그만 시골에서 내성적인 딸아이는 따돌림을 당해 상처를 받고, 영민하단 소릴 듣는 작은 아이는 이런데 있기는 아깝다는 소릴 들으며 저는 혼란을 겪었지요. 한해살이를 지날 무렵 시골살이는 흔들거리기 시작했어요.
불안은 영혼을 잠식한다고 하던가요? 추수 끝난 휑한 들녁처럼 깊은 우울과 불안에 빠진 저는 ‘내 남편이 이런 사람이었나’ 하고 각시가 놀랄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어요. 그렇게 뜨겁던 사람이 차갑게 죽어가는 모습을 안타깝게 지켜보고 있었겠지요. 그런 애비의 방황은 애꿎은 딸아이에 대한 폭력적 행동으로 나타나기도 하고...제 누나를 야단칠 때 말없이 울상짓던 어린 아들의 슬픈 얼굴! 돌이키기 싫은 아픔의 시간입니다.
귀농을 통해 40년 가까이 살아온 삶을 바꾸려는 결단으로 뿌리를 옮겨온 것인데 그 과정에서 엄청난 흙몸살을 앓으면서 겪게 된 불안심리, 그것을 아이들한테 투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이들이 안돼 보인다는 것은 결국 제가 스스로를 그렇게 보고 있었던 거구요. 아이에게 화를 내고 있었던 것은 결국 제 자신에게 화가 나 있었던 거에요. 아이들에게 문제가 있어서가 아니라 제 감정, 제 걱정, 제 욕망에 복무하고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요.
큰 아이는 고등학교 과정에, 작은 아이는 중학교 과정부터 일반학교가 아닌 대안학교를 보냈습니다. 이때도 주변 분들이 많이 안타까와했어요. 저 아까운 아이를 잘 공부시켜 명문대를 보내지 않으려고 하냐고. 그런 분들에게 ‘제가 욕심이 많아서 그래요. 우리 아이가 시험만 잘 보는 아이가 아니라 더 큰 공부를 하길 바랍니다’라고 말했지요.
대안학교 학부모로 산지 7년. 그동안 내 선택이 잘한 일인지, 내가 기대하는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는지 부대끼면서 지냈어요. 대학입시를 우선에 두지 않고 대안교육을 선택한 부모로서 어찌 갈등과 고민이 없었겠어요. 학교와 선생님들께 실망하고 무수한 토론으로 밤을 지새기도 했지요. 세상의 흐름을 거부하고 지사적 결단으로 보낸 학교가 내가 바라는 인간형을 키우는 그런 학교이기를 원하고 있었지요.
갈대처럼 저희 부부도 옆집 엄마의 말에 흔들리고 있더라구요. 정말 이 험악한 사회에서 내 아이가 부모의 잘못된 선택으로 나를 원망하지나 않을까 하는 자책감. 그러니 제 얼굴이 어찌 편안할 수 있으며 행복할 수 있었겠어요.
그런 굴곡을 거쳐 귀농 10년 만에 감사하게도 깨달음이 찾아왔어요. 아프지만 이렇게 물었습니다. 아이가 내가 바라는 그런 사람으로 자랐으면 하는 바람은 누구를 위한 것일까? 내가 바라는 모습과 거리가 생기고, 나의 취향과 맞지 않게 행동할 때 나는 어떻게 했던 것일까? 그게 아이를 위한 것이었을까? 나를 위한 것이었을까? 학교에서 내 아이를 이런 인간으로 성장시켜 주기를 바라면서 나는 과연 아이를 위해서 무엇을 했을까?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면서 왜 자식은 그런 인간으로 살아가기를 바라는 것일까? 내가 그렇게 살고 있지 않다면 자식에게도 기대하지 않는 것이 마땅하지 않은가?
내가 좋아서 하고는 상대방을 위해서 한다고 착각하는 것, 내가 좋아서 해 놓고는 그걸 몰라주냐고 원망하는 것, 그래서 위험한 독이 되는 게 사랑이더라구요.
지난 겨울 아들 형민이와 대전의 한의원에 다녀오면서 오랜 시간 많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아빠의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살아온 이야기를 다 털어 놓았어요. 여러번 같이 울면서...
그날 아들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형민아, 아빠는 네가 집에 왔을 때, 왜 표정이 어두울까 늘 마음이 쓰였어. 왜 밝은 표정으로 환하게 웃지 않을까 걱정했어. 형민아, 미안해. 부모와 자식은 피를 나누고 세포를 나누고 유전자를 나눈 사이잖아. 부모가 힘들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파장이 그대로 전해져 자식도 마찬가지로 힘들다고 하더라. 그래서 혈육이라고 하지. 네가 그동안 힘들었다면, 그건 아빠가 그래서 그랬던 거야. 정말 미안하다, 미안하다. 아빠가 이제 다시는 너 힘들지 않게 할게...”
내 자식이 못나 보이고 울상을 짓고 있어서 화가 난다면, 아이를 못마땅하게 생각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을 들여다봅니다. 혹시 내 삶이 힘에 버겁고 불만으로 차 있는 건 아닌지... 자식이 내 거울이더라구요.
내 문제가 풀리지 않으면 자식 문제도 쉽게 풀리지 않습니다. “너는 나처럼 살면 안돼” 그러니 주입식, 암기식 공부라도 잘해서 이 경쟁사회에서 살아남기를 바라며 내 자식만의 계층상승이라는 덫에 걸려 있는 것은 아닌지요. 가능할 것처럼 보이는 그 신기루에 빠져 우리는 뜨거운 사막을 건너고 있지는 않은지요.
때가 되면 꽃이 피는 것을 의심하지 않듯이 내 자식을 하느님처럼 믿어 의심치 않을 때, 내가 자유로워지고 아이들도 행복하고 자유로워진다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된 것은 지천명의 나이에 큰 축복입니다.
오늘도 저는 “경언이 하느님 감사합니다!” “형민이 하느님 감사합니다!”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하게 되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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