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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걱정없는세상/회원의 이야기

문화제고백② 우리들의 잔인함과 이기심으로 스러져 간 어린 생명들에게...

이 글은 2012년 9월-10월 두달동안 광화문 동화면세점 앞에서 열린 <선행교육금지법 제정을 위한 성찰과 고백의 광장, 시민 문화제>에서 낭독된 글입니다.


2006년 가을, 운좋게도 미국 직장에서의 근무기회를 얻게 된 저희는, 2살,6살 어린 두 아이를 데리고 설레임 반 두려움 반으로 미국행 비행기를 탔습니다. 그날, 갓난 아기 때부터 아이들을 금지옥엽같이 키워주시던 시부모님은 그 누구보다도 저희와의 이별을 아쉬워하셨지요. 이미 연로하셨던 탓에 “이제 다시는 저 어린것들 못 볼지 모른다”는 말씀이 내내 마음을 울렸습니다. 그렇게 떠나온 고국, 부모님과 함께 했던 고향을 그리워하면서도 아이들이 유치원과 학교에서 행복하고 자유롭게 지내는 모습을 지켜보며 평화로운 세월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어느덧 약속된 3년이 다 되어, 저희는 고향으로 돌아와야 할 시간을 맞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에 사는 사람들, 백이면 백, “애들 가르치기 힘든데 뭣하러 한국엘 가냐” “한국이 어디 애 키울 수 있는 데냐”고 하며 극구 귀국을 말렸습니다. 그중엔 돈 벌어 부치는 기계처럼 살아가는 기러기 아빠를 두고 온 아내도 있었고, 손주들 맡아 줄 채비로 빨리 귀국 날만 기다리시는 노부부의 딸도 있었고, 긴 병환 끝에 조용히 돌아가신 홀어머니의 장례식에조차 못 가는 외아들도 있었습니다. 모두 한결같은 이유는 ‘아이들 잘 키우기 위해서’ ‘애들 교육 하나 때문에’였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커가는 아이들은, 멀리서 돈만 벌어다 주느라 얼굴 한번 보기 힘들었던 아빠에 대한 그리움이 점점 없어졌고 더구나 이미 돌아가신 초라한 할머니의 어떤 이야기도 굳이 기억할 이유는 전혀 없었습니다. 모두들 아이를 잘 키우겠다면서 어딘가 결핍되고 파편화되는 가족의 모습들 뿐,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 모습뿐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디, 한번 보여주지, 한국에서도 행복하게 아이들 잘 커가는 모습을’하며 모두의 만류를 뒤로 하고 자신있고 당당하게 한국땅을 밟았습니다. 하지만 도착하자마자 달려가야 했던 곳이 병원 중환자실, ‘애들 오기만 기다리시다 병드신 할아버지’가 누워계신 곳이었습니다. 내내 상태가 악화되셨던 아버님은, 병원규정을 어기고 거친 실랑이 끝에 중환자실로 들어간 아이들 얼굴을 보자마자, 크게 웃음까지 지으시며 들리지 않는 팔을 끌어 아이들 뺨을 어루만져 보시기까지 하셨습니다. 그리고 정말이지 그렇게 그리던 손주들이 와서인지 금방이라도 회복 되실듯해 보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된 고국에서의 생활...그런데 학교를 보내고 주변 엄마들을 만나면서 이상하게도...낯선 미국에 아이를 내려놓았을 때는 못느꼈던 불안감이 갈수록 더했습니다. 너무나 놀기만 좋아했던 아이들, 노는 게 공부처럼 여겨졌던 학교생활이 이제는 공부하는 게 전부처럼 되어버렸고 매일 매일 어린 것들이 지쳐가는 게 역력했습니다. 2학년에 처음 들어간 큰애는 여기저기서 ‘왜, 빨리 영어학원 안보내냐? 영어를 좀 하니까 비싸도 원어민학원보내라~ 수학은 기본 1년치는 선행해라’ 그것도 모자라 아예 ‘이 동네는 좋은 학원 없어서 미리 미리 선행해서 가르치고 앞서가기 힘드니, 어디어디로 이사가라~!!! 그렇게 만나는 엄마들마다 늦춰진다고 난리였지요.


그런 전쟁같은 현실에 적응을 못하고 있던 저희부부는 ‘한국을 오는 게 아니었어, 뭣 때문에 우리가 여기에 왔지?’하며 후회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우리는, 어서 빨리 이 지옥을 벗어나서 다시 좀 편하게 애들을 키우고 싶은 것외에 다른 건 생각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애들 교육 하나 때문에’ 또 다시고국을 떠나고 싶었던 우리의 갈등과 후회를 알았던 걸까요? 아이들 면회가 자유로운 일반병실로 곧 내려올 것만 같으셨던 아버님은 2009년 추운 늦가을, 아무런 유언도 없으신 채 조용히 숨을 거두셨습니다.


지금 저희는 죄책감을 버리지 못한 채 한국에 남았습니다. 아이 하나 잘 키우겠다는 부모 마음이 너무나 이기적이고 잔인해서 이렇게 내 부모에게도 무관심해질 수 있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마음이 오히려 아이를 더 벼랑으로 내 몰수 있다는 사실에 놀라면서 말입니다. 실수투성이 시험지 때문에 우는 아이도, 형편없는 성적표를 받고 실의에 빠진 아이들도 가장 먼저 달려가 위로받고 울고 싶었던 곳은 엄마,아빠 품이었을 것인데도 그 한켠에 인색한 게 우리들이었습니다. 힘들어서 더 이상 따라가기 힘든 선행, 경쟁학습 때문에 자꾸만 병들어 가는 우리 아이들, 그렇게 병이 깊어지도록 우리 엄마 아빠들은 아이들을 부여 앉고 같이 울어주지 못했습니다. 자꾸만 엄마 곁에 들어와서 숨고 싶고 쉬고 싶은 우리 아이들, 또 다시 내몰며 더 잘해라 잘해라 하면서 등 돌리던 우리들이었습니다. 그렇게 오갈 데 없이 조금씩 조금씩 부모에게서 어른들에게서 떠밀려 떠밀려서 그 여린 생명들은 결국에는 하나 둘 한줌의 재로 스러져 갔습니다. 그 아이들이 가장 그리워했던 것도 가장 애타게 찾았던 곳도 한 켠이면 되었을 우리들의 가슴, 한 줌이었으면 되었을 우리들의 눈물이었을텐데요. 괜찮다 괜찮아!! 어루만져 주고 다독여 주는 한 뼘이면 되었을 엄마의 손길이었을 텐데요.


전 오늘 국화꽃 한송이를 들고 왔습니다. 돌아가신 아이들 할아버지께 드리는 마음의 속죄와 함께 우리들의 잔인함과 이기심으로 스러져 간 어린 생명들에게 우리 모든 부모를 대신해서 속죄하려 합니다. 그리고 아이를 힘겹고 지치게 하는 경쟁에 내모는 선행교육을 멈추고 천천히 아이들을 키우겠다고 다짐합니다. 그 아이들의 슬픔, 그 아이들의 아픔, 그 아이들의 상처를 천천히 읽어낼 수 있는 속도로 가겠노라고...그래서 필요하면 언제든 우리 품을 내어주고 같이 울어줄 수 있는 부모, 정상적인 속도로 호흡하고 공감하며 달려가면서 그 안에 있는 희망과 기쁨을 알려 주는 부모로 살아 갈 것을 약속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