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로고에 있을 때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던 내 삶의 이야기이다. 그때 마음으로 10편 정도를 죽 쓰리라 생각했는데, 결국 두편만 쓰고 나는 학교를 그만 두었다. 내 이야기를 수업시간에 들으면서, 자기의 아픈 삶을 위로받은 그 모습이 눈에 밟힌다. 나는 언제 못다한 내 이야기를 풀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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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키우기는 가난이 더 좋다." 어느 날 전철 안에서 신문에 실린 자녀교육도서 서평 헤드라인을 보자 눈이 번쩍 뜨였다. 워낙 없이 살아서 늘 쫀쫀했던 나는 결혼한 후, 아이에게 장난감 사주는 문제로 아내와 티격태격하다가 나름대로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아내에게 자주 밀리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내 입장을 지지해주는 책을 만난 반가움이란!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근본적으로는, 내 인생을 설명하는 것 같은 책 제목이 가져다주는 친숙함이 그 기사를 더 주목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인생 어느 한 때인들 그렇지 않은 때가 있겠는가만, 그래도 그 중 가장 어두운 시기를 말하라면 내 경우에는 10대 시절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TV에서 비치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상상 속의 모습이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결혼식도 치르지 않고 남편에 대한 애정 없이 평생을 살아오셨다. 경제능력이 없고 주색잡기로 가산을 탕진한 아버지 대신 어머니는 집안 경제를 책임지셔야했다. 당시 보수적이고 변화에 둔감한 시골에서 옷장사, 떡장사, 문방구 등은 남자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으나,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다. 그러나 그때마다 늘 터지는 부부간의 갈등으로 수개월을 못 버텨 도중에 그만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 역할을 하게 되니 집안 일은 자연히 장남인 나의 일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부터 나는 집안에서 밥짓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닭장사"를 시작한 후 3년째인 중학교 때부터는 나는 본격적으로 어머니의 동업자로 나서기 시작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20-30리 길을 자전거를 몰고 다니며 100kg이상의 닭을 실어 날랐다. 그 4-5년의 기간은 차라리 악몽이었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모여 등교 버스를 기다리는 아침 시간, 나는 그 무거운 닭짐을 실고 똥 뭍은 옷차림으로 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들도 있을 학생들 숲을 지나가야 했다. 그러나 그런 부끄러움도 참을 수 있었다. 내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러웠던 것은 다른 가게 아저씨들이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였다. 나보다 힘이 훨씬 센 아저씨들이 오토바이로 빠르게 뒤쫓아와 일찍 닭을 사서 비탈길을 힘들이지 않고 올라가는 모습은 정말 눈이 뒤집힐 일이었다.
절대시간이 부족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늘 괜찮게 공부하는 축에 속했다. 머리가 좋아서라기보다 공부는 나에게 생존이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안하면 평생 닭장사로 자전거 타고 다니며 인생을 끝내야한다는 두려움, 이 지긋지긋한 노동을 그만 둘 길은 오직 '공부' 밖에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여기에다 어머니의 위협도 한몫 단단히 했다. 어머니는 가끔 불안한 성적이 나올 때마다 "너 성적이 떨어지면 너희들 고아원에 보내고 나는 다른 곳으로 가련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이 너무도 예리하게 나를 아프게 했다. 어머니의 말씀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실제로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집안이 가난해서 선명회(지금의 world vision)을 통해, 어머니는 나를 미국으로 입양 보내시려고 했다. 밤에 나에게 양 부모님께 편지를 쓰라고 편지 내용을 불러주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 그 후 다행히 양부모들이 거부해서인지 한국에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나 "해외입양"도 생각하신 어머니였기에 어머니가 "고아원" 운운하실 때마다 빈말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런 공포감은 중학교 기간 동안 내내 공부에 대한 중압감이 되어 나를 힘겹게 했다.
나는 학급에서 왕따 당하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유난히 많은 편이다. 어린 시절 나도 마을에서 "왕따"를 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나에게 "마담"이라고 별명을 붙여서 10대 기간 내내 동네 아이들로 하여금 나를 놀리게 만든 "강길호"라는 친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언덕에 올라서 혼자 눈물을 흘리며 참 많은 상상을 했다. 그리고 강길호에 대한 분노. 그래도 그 속에서 나를 위로해준 생각은 "강길호는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없는데 나는 간다"는 그 한가지 점이었다.
아이들이 나를 싫어했던 이유는 확실치 않다. 전후 상황을 가지고 추측하건데, 공부 잘하고 어머니 도와서 열심히 일하는 나를 동네 어른들이 자식들을 꾸지람할 때마다 자꾸 들먹였던 것 같다. 거기에다가 집안 일 때문에 아이들과 잘 어울릴 시간도 없었고, 그럴 시간이 있었어도 집안 분위기로 어두워진 성격 탓에 어울리지 못하는 기질 탓도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 밤은 공포의 시간이었다. 내성적이고 나약한 성격, 똑똑한 아내로 인한 콤플렉스 등이 쌓여 아버지는 늘 밤늦게 만취한 상태로 귀가하여 거친 말과 폭력으로 의사표현을 하시곤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휘두른 몽둥이에 어머니가 맞아 무릎 뼈가 들어간 터라, 가족들은 늘 아버지의 비틀거리는 발걸음 소리에 예민해 있었고 여차하면 도망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래 저래 아버지를 증오했다. 아버지 없이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을 아버지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독히도 아버지를 미워했다.
시내에서 어머니와 장사하고 있었던 고 1 어느 날, 그때 비가 오고 있었다. 그날도 오랜 동안 집을 비우셨던 아버지가 장사하는 곳에 갑자기 술을 드시고 오셨다. 그 모습을 보고 너무도 놀라서 어머니는 뛰쳐나가시고 나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폭발해 아버지를 향해서 돌진하며 그분의 두 팔을 잡고 외쳤다. "아저씨, 왜 이래요!" 이 한마디에 나도 놀라고 그 소리를 들은 아버지도 놀랐다. "뭐라고, 아저씨라고?" 지금도 나는 아버지의 그 놀라며 슬퍼하는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만큼 아버지는 내 인생 속에서 지워진 존재였다.
또 한 장면이 생각난다. 그후에 우리 아버지가 가족들이 떨어져 살던 가게 옆 월세 방으로 찾아오셨다. 그리고 또 다툼이 시작되었다. 우리 집은 다시 쑥대밭이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은 시작되었고, 나는 이제 도무지 그 광경을 참지 못했다. 내 마음속에서 순간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옆에 야구방망이가 있으면 아버지의 머리를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마 그러질 못하고 대신 나는 그 자리에서 발작했다. 어머니의 놀란 외침, 그리고 싸움은 중단되었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내 생각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내가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였다. 교직생활 3년째였던 92년, 성경말씀을 통해서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위로하시며 내 인생을 받아주심을 온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당시 나는 아이들과 영어성경공부를 하고 있었고 그 주간에는 아이들의 구원의 문제를 성경을 통해서 풀어 주어야할 때였다. 더욱이 한 달 전에 한 선생님으로부터 내 신앙의 성경적 근거를 묻는 도전적인 질문을 받았던 터라, '구원'은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가 되어있었다. 영어성경으로 로마서, 히브리서, 요한복음을 읽으며 나는 너무도 절실히 답을 구했다. 그러다가 디모데전서 1장 15-16절 말씀을 통해 나는 이 모든 부담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말씀을 통해서 나를 만나주시는 하나님, 나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경험하게 되었다.
이런 경험이 있고 나서부터 나는 그토록 미워하였던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용서라는 적극적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의지적인 결단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마음 속의 분노가 봄철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듯한 체험. 아버지의 60세 생신 무렵, 나는 요양생활하고 계신 아버지를 찾아갔다.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로 온 몸이 망가진 아버지. 나는 그분을 어느 강가로 모시고 가서 나룻배를 태워드렸다. "아버지, 어머니가 원망스럽지 않으세요." "아니, 뭘 내가 잘못해서 그렇지 뭐." 쓸쓸하게 쓴웃음 지으며 나의 시선을 피하시던 그 아버지의 늙고 병든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며 그분의 인생과 화해하기로 했다. 그리고 숙소에서 내가 사영리로 전한 복음을 듣고 아버지는 신앙을 갖기로 하셨다.
교사가 되어 나는 갈등을 겪는 아이들에게 이 용서의 신앙을 알려준다. 그리고 늘상 담임생활을 하다보면 겪기 마련인 아이들과의 갈등이 있을 때마다, 나는 먼저 용서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틈나는대로 내가 믿는 하나님을 이야기해 준다. 물론 나도 공교육의 특징이랄 수 있는 "종교의 중립"을 모르는 바 아니다. 무턱대고 수업시간 잘라먹고 신앙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신앙 이야기를 일부러 피하지는 않는다. 꽤 학급운영을 열심히 해 아이들과 생활하는 것이 적지 않은 즐거움이었던 98년 말. 이제는 이 아이들이 내 손을 떠나 더 이상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때가 가까웠다는 사실에 나는 못내 안타까왔다. 그리고 그것 하나만 있으면 인생을 꿋꿋히 살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를 한명 한명에게 들려 주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MT 저녁시간이었다. 서해안 관광농원에서 밤늦게 아이들과 공동체 놀이를 하다가 서로에게 격려의 글을 써주고 글 써준 사람의 이름을 맞추어 보는 게임 시간, 박상희라는 아이가 내게 써준 글이 나를 놀라게 했다. "선생님은 다 좋습니다. 그러나 전도하는 것은 싫습니다. 아이들이 지금 얼마나 싫어하는 줄 아세요."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진심을 아이들이 알아주지 못해 섭섭한 마음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참된 것을 이야기하다가 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외면 당하는 것을 경험. 총각 때부터 늘 따라다니던 인기관리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진정 선생이 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 버림받으면서 고독한 길을 걸어갔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어두운 이런 시절, 나는 가난 속에서 한순간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 예민함이 있었다면 살아갈 수 없었기에 나의 감성적 둔감함은 차라리 축복이라고 말해야했던 그 시절. 그러나 어린 시절의 어두운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불행에 빠진 아이들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교사의 능력으로 변화되었다.
이번 구정 때 이집트 왕자 2를 보았다. 애꿎은 운명의 장난으로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 이야기였다. "이 고통의 이유를 알고자 하는 마음도 내려놓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감옥 속에서 부르던 그 독백의 곡조가 내 인생의 지난 시절을 노래하는 것 같아 나는 아들 여명이 몰래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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