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교육걱정없는세상 국민교실(1)
영어사교육 광풍에서 살아남기 제3강 - 서울대학교 영어교육학과 이병민
강의를 들으면서 계속 눈물이 났다. 그 슬픔의 근원은 무엇일까? 이 나라에 태어나 살아가는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을 얽매고 있는 멍에였다. 단순한 영어사교육 광풍의 근원이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 박힌 상향지향적 경쟁구조가 조선왕조의 역사보다 더 오래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예컨대 조선시대 대학자들이 학문의 목적이 입신양명의 수단으로 전락하였음을 수백 년 전 그들의 책에서 지적하였음을 알게 됨은 놀라운 발견이었다. 성호 이익은 현 우리의 강남8학군과 같은 귀문세가貴門世家 자녀들만 과거에 합격을 하는 현상[i]을 개탄하였다. 다산 정약용은 일률적인 과거라는 격식에 맞추어 본인의 개성을 무시당하는 교육현실을 그의 책[ii]에서 고발하였다. 명종대의 조종도는 불합리한 경쟁구조도 변하는 과거의 현실과 교육이 지방과 서울의 학생들을 골고루 등용하지 못하는 문제점을 밝혔다. [iii] 이러한 거대한 골리앗과 같은 과도한 경쟁위주의 입시위주의 교육의 현실을 살펴보며 대안을 생각해보자.
논점 1 학교에서 배운 것으로 누구나 입시에서 좋은 성적을 받을 수 있다.
- 어렵다.
- 학교에서 학습의 내용을 제대로 배워지는 것이 아니라 개인이 혼자서 또는 학원이나 과외에 의해서 보충이 되어지는 것이 우리 교육의 현실이다.
- 과도한 父母의 학업에의 압력으로 학생들은 수동적이고도 방관적인 학습자가 되어가고 있다. 평가결과도 하위와 상위에 몰려있는 기형적 정상분포곡선과는 거리가 멀다.
- 기형적인 사교육의 결과로 대학진학에서 드러나는 현실은 학부모의 소득수준과 상당한 관련을 보여주고 있다. 고소득일수록 소위 일류대학으로 진학하는 비율이 높다.
- 우리나라에는 모두가 신뢰할 수 있는 평가 척도가 없다. 내신 성적, 수학능력시험으로도 부족하여 논술시험 등을 도입하고 있다. 어떤 평가도구를 마련하더라도 성적 위주의 경쟁 선발체재 아래에서는 또 다른 사교육을 양산할 뿐이다.
- 우리 나라에서 한 사람을 평가하는 척도는 학벌, 재력, 배경, 관계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논점 2 나의 교육열은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이다.
- 아니다.
- 교육열은 배움에 대한 갈망이 표현된 것으로 교육의 본래의 목적이 배움의 기쁨을 누리기 위한 열정이자 시도이다. 한국의 교육열은 사교육에서 폭발적으로 나타난다. 사교육의 본질은 입시경쟁에서 선발되기 위한 것이다. 성적이 유일한 잣대가 되고 있는 현 상황에서는 훈련과 반복이 중요하다.
- 사교육의 근본 목적은 누가 먼저 더 멀리 진도를 나가느냐 하는 것이다. 입시 요강에 따라 사교육시장의 행태가 변화하는 것은 우리 모두가 주지하고 있는 사실이다.
- 영어 하나를 배우기 위해 모든 것을 감수하는 가정이 늘어나는 현실이다. 기러기 아빠, 펭귄 족이 늘어나고 있다. 언제 미국 행 비행기를 타느냐 하는 것은 강남에서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처럼 여겨지는 기형적인 사회가 되고 있다.
- 소득이 높을수록 소위 일류대학으로 가는 비율이 높은 한국의 현실에서는 일류대학진학이 세습적인(?) 가난을 벗어나는 유일한 수단이 되고 있다. 학부모 모두가 나처럼 살게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으로 과도한 사교육비를 지출하고 있지 않을까 ?
논점 3 경쟁적인 구조에서 공부하는 것은 인생의 장기적인 관점에서 긍정적이다.
- 아니다.
- 청소년기에 약간의 경쟁은 필요하다. 하지만 우리나라 교육현실에서는 초등학교부터 시작된 경쟁이 고등학교 즉 청소년기가 끝날 때까지 지속된다. 이러한 치열한 경쟁 속으로 아이들을 내모는 것은 불합리 할 뿐만 아니라 야만적인 행태이다.
- 청소년기는 자아를 탐색하며 재능과 능력을 키워가는 인생에서 가장 자유로운 선택이 주어져야 하는 시기이다. 경쟁은 20세 이후로 미루어져야 한다.
- 우리나라는 20살 까지 공부하여 성취한 것으로 나머지 60년을 살아가는 불합리한 사회구조이다. 경쟁으로 몰아가는 사회구조는 자율성을 가진 인간의 존엄한 가치를 잃어버리며 살아가게 한다. 삶을 이끌어가는 강력한 동기가 되는 내적인 만족감과 성취감을 느껴 본적이 없이 공부한 학생이 대다수 이다.
- 우리 모두가 패배자라는 열등 의식에 사로 잡히게 하는 이런 왜곡된 입시경쟁중심의 교육제도를 진정 누구를 위한 것 인가? 우리아이 모두가 행복한 사회를 구성하며 살아 갈 수 있을까? 과도한 경쟁에 몰려 성장기를 보낸 우리아이들에게 가능할까?
논점 4 우리나라 교육을 통해 배움을 즐기는 사람을 배출한다.
– 아니다.
- PISA보고서(2003년)에 의하면 대한민국 15세 학생들의 학업성취도는 거의 최고 수준이었다. 학생들이 느끼는 자신감(self-efficacy)나 흥미도(Interest)는 최하위권으로 떨어진다. 또한 학습 불안감은 튀니지아, 브라질, 타일랜드, 멕시코, 일본 다음으로 6위로 거의 최고 수준이다.
- 우리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오랜 시간 공부한다. 주로 문제 맞추기, 틀리지 않기, 높은 점수 맞기, 정답 맞추기 이다. 이렇게 아이를 한 줄 세워 도대체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얻으려 하고 있나?
- 서울대에 입학한 학생도 스스로 만족하지 못한다. 많은 수의 대학 신입생의 마음에는 재학하는 학교 보다 성적이 높은 대학을 가려다 못간 것에 대한 패배의식이 자리잡고 있다.
- 우리 교육이 이런 배움의 즐거움을 경험하도록 하는가? 인간에게 행동의 동력을 제공하는 것은 동기이다. 그 것도 외적인 보상이 아니라 내적인 만족감과 성취감이다. 어려움이 와도 끝까지 해낼 수 있는 하고자 하는 동기와 열심히 노력하는 마음을 길러 주고 있는가? 슬프지만 아니다.
논점 5 그러면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 배우는 기쁨을 알게 하자.
-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운영하자. 가르치지 않고 평가하는 비윤리적(미국심리학회 평가 윤리 규정) 평가가 더 이상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교육과정에 근거한 평가기준을 마련되어야 한다. 학교에서는 지필고사 위주의 평가를 지향하는 것도 필요하다.
- 교사에게 교육내용을 평가할 수 있는 자율권을 주어야 한다. 교사에게 평가와 입시를 떠난 교육을 할 수 있는 제도 또한 마련해야 한다. 학생들의 학업성취도와 수준 및 진도에 따라서 완급을 조정할 수 있어야 한다.
- 무엇보다도 다양한 가치가 존중되고 자율적인 개인으로 성장하도록 학생을 도와야 한다. 인간이 그 자체로서 존중 받을 수 있어야 한다. 평가보다 배움이 먼저 이어야 한다.
- 공정한 경쟁과 보상이 이루어져야 한다. 삶은 신념을 가지고 자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열심히 노력하는 사람의 것이다. 그들이 이룩한 성취와 업적에 대해서 진정한 가치를 부여하는 성숙한 사회로의 변환을 일으켜야 한다.
- 내신성적과 대학수학능력시험의 입시를 학교의 존재 목적으로 전락시키는 한국의 왜곡된 교육현실을 변화하기 위해 모두가 함께 지혜를 모을 때이다.
공교육의 근본 목적에 대한 질문이 던져진다. 한 사회의 시민의식의 성숙도는 가장 가난한 자, 연약한 자를 어떻게 대하느냐에 달려있다고 한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 가장 어린 자인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 아침 8시부터 저녁 11까지 학교로 학원으로 과외로 가르친다(?). 한 시 교육청에서는 밤 11시 이후에도 학원영업을 허용하는 것을 논의하였다. 시민들은 재고의 가치도 없는 그 안에 대해 열띤 논쟁을 벌이는 것이 우리 사회의 현주소이다.
배움의 즐거움이 사라진 교실. 과도한 경쟁으로 내모는 입시제도. 매년 아이들이 150명이 더 이상은 이렇게 살 수 없다고 귀중한 생명을 자신의 손으로 끊고 있다. 이 것이 우리 교육 처한 현실이다. 모든 것을 실용주의적인 가치로 재는 이런 야만적인 행태의 교육이 더 이상 지속되지 않아야 한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나와 다른 의견을 가진 사람의 말을 경청하는 기술, 첨예한 갈등 상황 가운데서 서로 win-win 할 수 있는 의사소통 능력, 새로운 갈등 관리 기술, 좀더 발전된 집단적 의사 결정의 체계적인 훈련이 아닐까?
강의 내내 나는 어떤 교사인가 생각하고 있다. 영어를 가르치고 있나? 아니면 아이들을 가르치나? 하는 질문이 떠올랐다. 제대로 이 시대 학교 교사로 살고 싶다. 나는 아이들에게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이다. 영어가 목적이 아니라, 아이들의 배움이 진정한 가르침의 목적이다. 나는 좋은 교사가 되고 싶다. 리처드 마우의 <무례한 기독교>라는 책에서 발췌한 내용(p131)이다. 나는 이런 학교를 꿈꾼다.
좋은 교사는 진심으로 자기 학생들에게 선한 영향력을 미치고 싶어한다. 하지만 가르침이라는 것이 일차적으로 강압에 의존해서 이루어질 수는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그리고 무관심한 자세로도 결코 가르칠 수 없는 법이다. 유능한 교사는 잘 배우는 자가 될 필요가 있다. 가르침을 그저 정보를 나누어주는 것이 아니다. 내가 교단에 설 때는 내가 가르치는 과목이 내 앞에 앉아 있는 학생들을 풍요롭게 하고 그들의 능력을 부여하게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내가 그 내용을 과거에 얼마나 많이 가르쳤는지에 상관없이 교실에 설 때 마다 새로운 자세로 임해야 함을 의미한다. 새로운 학생들과 만날 때 마다 상호 작용을 통해서 나 역시 기꺼이 변화되고자 하는 자세를 지녀야 하는 것이다.
[i] 성호사설 제 1권, 인사문
[ii] 오학론, 국역다문시문집(5) 124면. 재인용-강명관의 조선의 뒷골목풍경 p. 189
[iii] 조종도. 책문 시대의 물음에 답하라, 김태완, p 285
* etson 회원님의 글입니다.
http://news.noworry.kr '영어 사교육 국민 교실 강좌 수강생 나눔터'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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