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 21일, 두 달간 성실하게 달려온 진로학교의 마지막 시간이다. 우리 아이들을 위한 진로의 고민으로 시작해서 우리들의 고민으로 이어져 더욱 깊이 있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 마지막을 장식할 송인수 대표님의 강의를 두고 윤지희 대표님은 지금까지 강의하셨던 다른 분들에 못지않게 본인 삶의 풍성한 이야기들과 지난 7번의 강의를 정리, 분석하는 훌륭한 강의가 될 것으로 예상했다. 그리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앞서 강의했던 대부분의 분들은 가난과 외로움 속에서 쉽지 않은 유년 시절을 보냈다. 어떤 이는 그 시기 속에서 책을 벗 삼아 지내기도 했고, 어떤 이는 내면의 고뇌와 아픔을 겪기도 했다. 대표님 역시 가난하고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는데, 아버지가 없는 어두운 가족사진으로 그 분위기를 짐작해 볼 수 있었다. 가난으로 인해 어릴 적부터 가사를 감당하기도 해야 했고, 어떻게 해야 가난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고민하고 부지런히 삶을 살기도 했다. 중학교 때가 되어서는 어머니와 닭 장사를 하면서 집안을 꾸려갔는데 그 때 직접 살생한 닭이 대략 20십만 마리가 될 정도로 닭 잡는데 전문가였다. 그 이후 대표님이 가난을 탈출하기 위해 선택한 다른 방법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것이었다.
공부를 정말 열심히 했나보다. 어머니와 함께하던 닭 장사와 학업을 병행하면서도 그 당시 공부를 잘해야 갈 수 있었던, 2강 강사이신 주상완 사장님이 다니셨던 금오공고를 지원했다. 학비면제, 기숙사 제공, 취업이 보장되는 금오공고는 대표님께는 더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하지만, 불행은 쉽게 떠나질 않았다. 성적은 문제가 아니었지만 6개월 차이로 나이제한에 걸려서 입학이 좌절되었다. 그 박탈감에 박정희 대통령에게 구구절절한 편지를 직접 보내기도 했었다. 결과는 국사에 바쁜 나랏님을 귀찮게 한 죄로 한달 동안 반성문을 썼다는 것이다. 그 이후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할 때도, ROTC를 지원할 때도 같은 이유로 대표님이 계획하고 원했던 길은 번번이 막혀버렸다. 육군사관학교를 지원할 때는 억울함에 못 이겨 재판을 청구하기도 했는데 역시 패소했다. 이번에는 한 판사에게 또 다시 구구절절한 편지를 보내 선처를 부탁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답은 우리의 예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정은 딱하나 딱히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이후 찾게 된 새로운 길은 지금의 대표님을 만들어준 작은 시작인 사범대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선생님이 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외무고시나 고시공부 등 다른 길들을 찾고 있었다. 그 당시 교사의 사회적 지위는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좋지 않았다. 하루빨리 가난에서 탈출하고자 했던 대표님에게 선생이라는 직업은 매력적일 수 없었던 것이다. 더불어 한 친구로부터 “잘난 놈들이 다들 교사하지 않으면 어떤 놈들이 교사하냐!”는 울림이 있는 외침을 들으면서도 선생은 끝까지 외면하고 싶었다. 또한 그 당시 대표님은 시대의 문제에 대해 대답하지 못하고 엉거주춤하며 살아가고 있는 본인의 모습을 보며 많은 고민들을 하게 되었다. 이동수 학생의 분신사건을 보며, 한 선배가 본인의 삶이 다 타도록 사회를 위해 살겠노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이후 87년 대선 감시운동을 하는 등 대표님 나름의 사회를 향한 몸부림을 치게 되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생각은 이 사회의 문제를 외면하지 않고 끈기를 가지고 문제를 풀어내고자 함이었다. 지금 주변을 보면 그 당시 함께 운동을 했던 동기들은 모두 다른 분야에서 각자의 삶을 살아가고 있고,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고 현재는 대표님만이 자리를 지키며 사회운동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개인적인 내면의 고뇌와 역경들을 거치며 대표님의 마음에는 세상을 이롭게 하고 싶은 마음과, 동시에 안정된 삶의 자리를 추구하고 싶은 대표님의 마음이 있었다. 그러나 교사로서의 삶은 여전히 막다른 골목에서 할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다. 그렇게 시작한 선생님의 길. 기대하지 않았던 기쁨과 보람은 있었고 나름 만족할 수 있는 생활이었지만, 아이들과의 만남으로 인한 행복감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갈증과 낯설고 불편한 감정이 존재했다. 지속된 개인적인 내면의 고뇌와 끊임없는 물음을 통해 대표님은 그 갈증들을 풀어갔고, 개인적인 결심들을 하면서 직업에 대한 본인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직업에 대한 상대적인 만족과, 절대적인 만족 사이에서 본인의 해답을 찾아갔으며, 어떤 직업을 선택하든 어떤 지위를 유지하든 모든 사람이 누릴 행복의 총량은 같을 것이라는 스스로의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또한 더 나아가 직업의 만족은 부르심 또는 개인의 소명으로서의 직업을 선택하면 자연스럽게 얻을 수 있는 부산물이며, 사회 속에서 개인이 있어야 할 자리에서 묵묵히 역할들을 감당하는 것이 삶의 행복과 만족만큼이나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내면의 고민과 갈등을 해결해 가면서 보다 구체적인 사회적 변화를 위해 나서게 되었다. 좋은 교사모임을 하면서 교육과 교사의 질을 향상시키고자 했으며, 일부분이 아닌 전체 교사들을 어떻게 바꿀지 고민하게 되었다. 육아 휴직, 병간호 휴직까지 하면서 교사운동에 헌신했지만 새로운 선택의 기로에 서게 되었다. 교사로서 운동을 할 수 있는 한계가 있는 상황에서 “운동에 나를 맞출 것인지, 나의 한계에 운동을 가둘 것인지?” 고민했고 결국엔 퇴직을 하게 되면서 보다 적극적이고 폭 넓은 활동을 했다. 때로는 교원평가제 등의 이해관계가 얽힌 문제들을 다루며 괴로운 일들을 겪기도 했지만, 운동을 포기할 수 없었다. “지나온 10년의 삶을, 그 이전에 30년의 삶과 바꾸지 않겠다.”고 할 정도로 그 시기는 대표님에게 의미 있고 가치 있는 시기였다.
박원순 변호사님의 직업 선택 10계명 중 남들이 말리는 곳이면 확실하다고 했던가? 지금의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운동을 시작하면서 주변의 우려와 반대도 적지 않았다. 하지만, 가지 말라고 했던 그 길에서 작지 않은 변화들이 있었다. 등대지기 학교를 하면서 많은 사교육걱정을 이기는 일꾼을 만들어내고 영어 사교육 포럼, 외고입시 등 각종 토론회를 통해서 해결책들을 제시하며 소책자뿐 아니라 단행본을 출간하기에 이르렀다. 작년 한 해 동안 MBC 9시 뉴스 인터뷰관련 사회 전 영역에서 가장 노출이 많았던 단체가 바로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이었다고 한다. 각종 신문 사설에서도 우리 단체를 언급하기도 했고, 정부는 이 운동으로부터 많은 아이디어를 얻기도 했다. 그런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여전히 진행형이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온다! 온다! 온다!” 외치던 그 구호가 이제는 마냥 현실감각 없는 외침이 아니다. 지금도 내년을 준비하면서 지난 활동을 되돌아보며 단체의 방향성을 다시금 점검하고 내년의 사업들과 일정들을 준비하고 있다. 아직 할 일이 많다. 회원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관심이 운동의 윤활유가 되리라 생각한다.
대표님은 더불어 지난 강의들을 정리, 분석하며 자녀교육 지침과 좋은 일자리의 기준에 대해서 이야기 하셨다. 지난 8강의 진로학교들을 천천히 기억하고 정리하면서 다시금 고민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이 좋겠다. 우리아이의 진로, 아니 우리아이의 삶과 그리고 나의 삶을, 아스팔트 도로처럼 잘 뻗은 직선이 아니어도 좋다. 우리 삶은 곡선이다. 그리고 그 곡선은 더 아름답고 가치 있는 삶이 될 수 있다. 지난 8강의 강사분들이 그 증인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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