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우학교의 교감이셨던 이수광선생님.
멋진 베레모를 쓰고 나타나셨습니다.^^
베레모를 쓰고 청바지를 입고 강의를 하는 교감선생님이 또 있을까요?
선생님의 얼굴과 복장에서 느껴지는 여유, 자유로움은
아마도 학교에서 아이들과 창의적이고 행복한 교육을 실천하셔서 그런게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공교육과 대안학교를 단순히 비교하면,
공교육은 마치 성적지향, 점수올리기 교육을 시키는 곳이고
대안학교는 아이들을 바람직하게 성장하도록 돕는 교육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요.
실은 우리 아이들이 대다수 다니는 보편적인 공교육이
아이들을 바람직하게 성장하도록 돕도록 고민하고 실천하는 교육의 장이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고 대안학교에 가야만 가능하다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입니다."
강의 시작 전, 윤지희 대표님이 하신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이수광 선생님은 공교육에 대해 어떤 꿈을 꾸고 계실까요?
공교육의 현실과 학교의 재구성, 그리고 교육의 본질을 성찰해보는 강의. 시작하겠습니다.
"제 강의는 썩 재미가 없습니다. 기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닙니다.
아이들의 공부 기법에 대한 이야기도 하고 다만 아이들이 잘 성장하기를 바라는기대는 많지만,
상대적으로 그런 학교를 어떻게 만들건가 하는 담론은 별로 없습니다.
그래서 오늘은
우리 아이들 다수가 가는 학교가 어떤 문제를 가지고 있고 어떻게 재구조화 되어야 하는지,
학부모들은 어떤 것을 할 수 있고 어떤 효과가 있을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은 학교'를 꿈꾸다
최근 교과부가 많은 학교의 유형을 양산했는데 대부분이 명문학교를 꿈꿉니다.
그런데 그런 학교들이 아이들의 성장에 보탬이 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교육의 본령을 제대로 하는 학교를 '좋은 학교'라고 명명하고 좋은 학교에 대해 함께 고민해 보겠습니다.
지금의 학교는 알파벳티즘(외워서 아는것)을 많이 알도록 아이들을 몰아가는 것이 아닌가요.
요즘 아이들이 알고 있다고 하는 것은 대부분 인터넷에서 1분 안에 해결할 수 있는 것들입니다.
단순히 외워서 많이 아는 것보다는 많은 정보들 중에서 취사 선택 할 능력을 기르는 것이 더 중요해졌습니다.
그런데 아직도 학교든 사교육이든 외워서 많이 아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도정일 교수님의 칼럼을 읽으면서 우리를 되돌아봅니다.
「 인간은 느리게 자라는 동물인데, 어느 순간에 성장의 속도가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는 게 아니냐,
아이들을 조생밀감으로 봐서는 안된다.
학교와 부모, 사회적 압력이 아이들을 촘촘하게 짜여진 시간 안에 밀어넣어 자유를 뺏고 있는건 아닌지. 」
학교가 문제입니다. 그럼, 학교만 바뀌면 될까요? 입시만 바뀌면 문제가 해결될까요?
부모의 사교육 열풍은 우리 사회의 한 단면일 뿐입니다.
부동산 열풍. 또 다른 열풍들이 있는데 교육에 대해서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러니까 문제가 풀리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환경이 가장 중요한 교육의 과정입니다.
아이들은 사회 분위기를 보고 느끼고 배우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 학교와 교사만 탓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삶의 모습에 대한 냉철한 삶의 판단이 있지 않으면
내 아이는 내 삶을 닮아갈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삶의 생태계 문제
삶의 생태계 문제를 얘기해보면,
우석훈 선생님이 얘기한것처럼 이제는 옛날과 달리
'산 입에 거미줄 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마을이 사라지고 이웃을 돌보는 관계망이 깨져버렸습니다.
우리 부모가 나눌려고 하지 않는데 우리 아이들이 나눌려고 하겠습니까.
산 입에 거미줄 치는 사회가 되다보니 각자가 불안을 느낍니다.
'위기인성'이 심화되는 거죠.
그러다보니, 효율보다 효과를 강조하게 되고, 단기승부의식을 느끼고 순간모멸의식이 생깁니다.
지금 당장 내 배부터 채워야 하고 이 순간 어려움만 넘기기 위해서 남을 생각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사회를 '속물지배사회'라고 이름붙이고 싶습니다.
'과시적 지위재', '과시적 교양재'.
드러내기 위해 박사학위를 받고, 드러내기 위해서 지식을 쌓는거죠.
드러내기 위한게 아닐려면 삶이 따라줘야 합니다.
교육담론을 이야기하는 우리도 우리의 삶이 따라줘야 합니다.
교육의 위기
자녀에게 전달하는 성공과 출세, '모유 이데올로기'가 작동하고 있습니다.
어머니뿐 아니라 할아버지도, 학교에서도 아이들에게 성공과 출세를 요구합니다.
교육의 핵심언어인 '존재'에 대한 질문이나 대화는 사라지고,
'수능, 학습지, 성적'이라는 단어만 사용되고 있습니다. '일상생활의 입시화'인 것입니다.
학교를 지배하는 보편적인 척도가 입시경쟁력과 영어경쟁력입니다.
그리고 학교의 의제가 소멸되었습니다.
아이들의 문제, 아이들의 진로에 대한 의제가 사라졌어요.
교과서에 대한 이야기만 있습니다.
방과 후 시간, 취미활동에만 관심있는 교사들이 많아졌습니다.
이런 환경에서는 아이들이 많이 배우지만
정작 배워야 할 것을 배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배움의 퇴행을 겪는 것입니다.
실존적인 고민들, 성장되는 과정에 그 단계별로 해야할 고민이 있는데 그런 고민이 결핍되는 거에요.
의제도 사라지고 관계가 약해지는 학교가 더이상 있을 필요가 있나요?
잘 가르치는 학원강사가 얼마나 많은데요.
학교는 관계를 통해서 배워야 하는데 관계가 사라졌습니다.
학교운영의 실제적 원리
실적주의, 물량주의, 형식주의, 일방주의에 목숨을 걸고 있습니다.
지역으로 갈수록 아이들은 더 붙잡혀 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학교의 돈을 쓰기 위해 보충수업으로 붙잡혀 있는 거에요.
교과서 진도만 나가면 공부가 끝났다고 생각합니다.
누구도 기대하지 않았지만 학교교육의 결과가 이렇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첫번째, 지적인 무기력성이 나타나죠. 정답이 없는 문제 앞에서 부들부들 떨죠.
두번째, 호기심을 상실합니다. 많은 양을 공부하니까 아이들이 버티지를 못합니다.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 호기심을 차단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성장동기'가 지체되구요.
학습동기보다 훨씬 더 높은 힘이 '성장동기'입니다.
성장동기는 공부와 상관없이 자기 삶을 자기 스스로 개척할려고 하는 의지입니다.
그런데 지적으로 무기력하고 성장동기 없이 다수의 아이들이 '문제를 푸는 존재'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교육현실의 살풍경
소위 명문대라고 하는 곳에 입학한 학생들 명단을 학교밖으로 보이게 걸어놨습니다.
저기에 이름이 없는 학생들은 어떨까요?
왜 학교는 다수의 학생, 다수의 학부모를 쪽팔리게 만드나요?
그런데 왜 다수의 학생, 다수의 학부모는 가만 있나요? 저항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저 현수막의 대학들이 좋은 대학인가요? 좋은 대학이라는 것은 달라질 수 있습니다.
고교인생은 내 인생을 좌우한다고 써놨죠. 천만에요. 고교 3년은 인생을 좌우하지 않습니다.
서울대가 4순위로 밀린 것은 의미가 있어 보이지만, 의예과, 한의대를 일순위로 보는 것은
우리사회의 불안심리, 안정된 직장에 대한 욕구가 반영된 것입니다.
그러나 의예과, 한의대 졸업하면 개원의는 빚지기 쉽고, 하루종일 침만 놓는게 행복하다고 할 수 있나요?
어떤 학교는 자기 반에 다른 반 친구를 들어오지 말라고 써놨습니다.
친구는 나를 형성하게 하는 존재입니다.
친구와 다름을 발견하면서 나를 발견하게 되는 것에요.
이런 현실이 참 안타깝지요.
이런 상품도 있습니다.
수능대박가방.
수능이 아무리 쉬워진다한들, '공부'에서 '배움'에서 '대박'이라는게 있을 수 있나요?
저런 말 자체가 여러영역에서 욕망을 추구하는 우리 사회의 반영이 아닐까요?
오히려 저런게 평상심을 잃게 하죠. 수능 전날 연락도 없던 삼촌이, 큰아버지가 전화를 하잖아요.
아이들이 더 불안해지죠.
부모와 자녀의 관계 형식
서구 아이들은 나이가 들수록 부모와 친구의 영향력 중에서 친구의 영향력이 더 커집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아이들은 나이가 들수록 부모의 영향력이 커집니다. 그 정점이 취직과 결혼에서구요.
아이들의 생활은 철저하게 의존적이게 됩니다. 그리고 가족구성원으로서의 책임과 의무를 면제 받습니다.
우스갯소리로 '아이들이 엄마에게 룸서비스를 받는다'고 하잖아요.
아이들이 부모의 학벌주의, 경쟁주의를 그대로 대물림합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우리사회의 소비재를 소비하기 위해서는 돈이 필요합니다.
아이들은 그럴 돈이 없는데 부모가 요구하는 대로 따르면 소비할 수 있는 자원이 생기게 됩니다.
그러다보니 유사성인으로 부모를 닮아가는 거에요. 러시아의 마트려시카 인형처럼요.
자기 주장의 근거가 엄마의 말에 두고, 존경하는 사람도 엄마에요. 초등학교 13학년이나 다름없습니다.
부모와 자녀간의 강한 동맹을 깨야 합니다.
원하는 순위안에 들지 못하는 자녀를 보며 부모의 '트라우마'가 생기죠.
그런데 트라우마가 생길때마다 부모는 더 많이 공부시켜야 한다는 환각상태에 빠집니다.
부모의 트라우마의 악순환도 깨야 합니다.
교육주체들의 삶의 단면
교육주체들인 학생, 학부모, 교사의 삶은 어떠한지 살펴보겠습니다.
2007년에 일본의 청소년연구소가 한,미,일,중 청소년들이 젊었을때 꼭 하고 싶은 일을 조사했어요.
한국학생들의 대답을 보세요.
'좋은 결혼 상대를 찾고 싶다'
'돈을 벌고 싶다'
저는 중국학생들과 미국 학생들의 대답이 참 마음에 듭니다.
'인생의 방향을 곰곰이 생각하고 싶다'
'어떤 일에도 낙담하지 않는 근성을 키우고 싶다'
'많은 책을 읽어 내면생활을 풍요롭게 하고 싶다'
'진지한 연애를 하고 싶다'
'외국에 가서 견문을 넓히고 싶다'
'고생을 해서 나를 단련하고 싶다'
'젊었을 때 가능한 모험을 하고 싶다'
'사회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성장동기가 있는 학생들에게는 저런것이 일상적인게 됩니다.
성장동기가 없고 학습동기만 있는 학생들은 저런게 불필요한게 될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이런걸 보면서 TIMSS(수학 과학 성취도 비교연구)의 순위 결과가 정말 중요하다고 할 수 있나요?
삶의 어떤 태도를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그 아이의 인생은 달라질 수 있는데도요?
2008년 연구에는 한국 아이들이 가장 많이 성공한 인생을 부자가 되는 것이라고 대답했습니다.
53.4%가 돈으로 권력을 살 수 있다고, 64%가 부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합니다.
저에게 딸이 있는데, 어느 순간 제 딸아이도 저런 대답을 할까봐 가슴이 철렁합니다.
다른 아이는 두고라도 내 아이가 저런 대답을 할까봐 겁이 납니다.
건강보험공단의 정신질환 진료 비율을 봅시다.
강남, 분당 아이들이 1,2위에요.
이 자료는 실제 병원 문을 열고 들어간 비율입니다. 병원에 가지 않은 아이들은 더 많겠지요.
우리 아이는 아닐거라고 생각하며 있다가 바닥을 치고 나서야 놀라죠.
초등학생 4,107명을 전수조사했더니 1/4이 문제행동을 가질가능성이 많다고 합니다.
유니세프의 현대리서치를 보면 객관적인 교육환경은 너무 좋지만 아이들의 주관적 행복수치는 낮게 나왔어요.
학부모의 삶은 어떨까요.
기러기 아빠, 고3을 둔 엄마...
우리 부모님들의 삶이 굉장히 왜곡되어 있어요.
운전수, 정보수집가, 감독자, 매니저, 치어리더의 역할까지 해야 합니다.
어떤 어머님이 저에게 그런 이야길 했어요.
고3 딸이 자기에게 막 대하는데 어쩔줄을 모르겠다고 해요.
교사의 삶도 힘듭니다.
교사직업병이 어떤걸까요? 교원 10명 중 6명이 직업병이래요.
자기가 잘못해놓고 인정하지 않는 것도 직업병이에요.
성대결절이나 무릎통증 등 여러가지가 있죠.
충격적인 것은 한 조사에서 한국교사의 자기효능감이 꼴찌로 나왔습니다.
자기효능감은 교사로서의 자신의 힘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자기효능감이 없는거에요.
'나는 내 학생들의 삶에 중요한 변화를 주고 있다고 느낀다', '아니다'
'내가 열심히 노력하면 내가 다루기 힘든 학생도 지도할 수 있다', '아니다'
'나는 일반적으로 학생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알고 있다', '아니다'
한국 교육이 일상생활이 입시화되어 있고 배움의퇴행 이 일어나고 인습적 교육관이 퍼져있는데
왜 이런 것이 여전히 지지되고 있을까요?
한국 사람들이 직선의 사고, 직선의 감정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일류대학에 들어가면, 일류직장에 들어가면 행복할 것이라고, 노후가 보장될 것이라는 직선의 사고를 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삶은 꼭 그렇게 흘러가지 않죠.
이런 식의 사고에 사로잡혀 있다면
교사는 학생에게 적응하지 못하고 학교는 사회흐름에 적응하지 못하고
학부모는 교육열을 가지고 있으나 아이의 성장에는 도움이 되지 않는 구시대적인 방식을 가지고 있게 됩니다.
그렇다면, 학교를 어떻게 '재구조화' 할 것인가?
먼저 우리의 인식 프레임, 사고의 틀을 바꿔야 합니다.
배움의 본질은 무엇일까요?
세상의 이치를 깨우치고
자기 주변에 나와 다른 사람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내 실존을 책임지는 것은 나 스스로라는 것을 깨닫는 것입니다.
나로부터, 내 삶으로부터 도망갈 수 없습니다. 이것을 깨달을 때 내 옆의 사람도 소중하게 여길 수 있습니다.
배움의 목적이 무엇입니까.
부모가 있을 때 잘 사는 것이 아니라, 부모가 없어도 잘 살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죠.
이런 것에 근접하도록 학교에 배움을 요구해야 하죠.
특정 도식 속에 학교를 넣고 생각하면 학교는 바뀔 수 없을 것입니다.
실존적 고민을 자극하고, 배움의 즐거움이 있는 공적 공간으로서의 '학교'에 대해 고민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
거창고의 직업선택 10계명 속에 실존의 고민이 들어있습니다.
'가장자리로 가라, 남들이 가지 않는 곳으로 가라,
승진의 기회가 없는데로 가라,
왕관이 아니라 단두대가 기다리는 곳으로 가라'
그런 질문을 받고 고민속에서 공부해야 할 자기 이유가 생기고, 공부하는데 따르는 고통을 이겨낼 수 있습니다.
공부 기법의 문제는 두번째입니다. 이런 점에서 인식프레임을 달리 해야 합니다.
학교운영은 세금으로 하죠. '비용의 사회화'인데요.
교육공공성에 대한 재해석이 필요합니다.
국민세금으로 공부한 아이들이 사회로 환원할 수 있도록 해야 하는거죠.
공부의 결과가 다시 사회로 환원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위로 올라가기만 원하지 어떻게 나눌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죠.
학교는 경쟁력(비교우위력)보다 공헌력(경쟁력+나눔의지)을 가져야 합니다.
학교는 '공공하는 학교'가 되어야 합니다.
공공하는 과정은 '나 이외의 문제에 관심을 가지는 것', '공통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는 것',
'문제해결의 과정에서 타인을 배제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런 과정을 해온 아이들이 공헌력을 가지겠죠.
학교를 새롭게 규정해 보자.
새로운 학교에 대해 생각해봅시다.
학교는 '공부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까? 아닙니다.
공부하는 곳을 넘어 '삶을 나누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삶을 나누는 과정이 되다보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극을 주게 되어있습니다.
시험 못 쳤다고 선생님에게 혼나고 자존심 상하는 자극이 아니라
아이들끼리의 교육과정에서 받는 자극은 스스로를 움직이는 동력이 됩니다.
집합적 지성, 집합적 창의성을 가지려면 학교는 삶을 나누는 과정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에서 강조해야 할 역량은 무엇이어야 할까요?
질문 잘하는 능력이 필요합니다.
질문 잘하는 친구는 미래의 성취능력이 높습니다 . 지금 공부 잘하는 것보다 미래의 성취능력이 높을 것입니다.
지금처럼 복잡한 문제를 가진 사회에서는 차원을 넘나드는 사고를 해야 합니다.
질문 능력과 함께 필요한 것이 관계능력입니다. 인간에 대한 애정이 있을 때 질문은 솟아납니다.
세번째는 기획능력입니다. 머리 속에서 만이 아니라 실제로 움직여 봐야 합니다.
농촌에 가서 땡볕에서 일을 해본다거나 하면 경험을 통해 머리 속의 생각들이 달라집니다.
교과서 속의 배움의 가치보다 몸으로 경험하는 배움의 가치가 더 큽니다.
네번째는 '공공하는' 능력입니다. 공동의 이익을 추구하며 함께 할때는 불가피하게 자기 희생이 따를 수 밖에 없습니다.
자기의 욕망을 줄이면서 타인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공적 가치를 추구하게 되는거죠.
작년에 골드만삭스라는 회사에서 서울의 대학생들과 워크샵을 했습니다.
인재를 볼 때 가장 눈여겨 보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인사담당자가 커버레터가 의미있는지 본다고 합니다.
커버레터는 이력서와 다른, 자기 삶에 대한 스토리입니다.
그리고 고급스런 언어를 쓰는지 본다고 합니다.
일상적으로 고급언어를 쓰는 것은 여러가지 사고회로가 있다, 사고의 깊이가 있다는 것이죠 .
두번째, 학교운영구조를 개선해야 합니다.
지금의 학교는 교육청, 교원이 독점하고 있습니다.
교원이 학교의 권력을 독점 하고 있고 학생이나 학부모가 참여하지 못하다 보니까
학교 운영이 과거나 현재나 변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이 학교운영에 참여하다보면 자기 책임감을 가지지 않을 수가 없어요.
학부모에게도 권력을 나눠준다는 것은 책임을 나눠가진다는 것입니다.
학교의 운영을 교원, 학생, 학부모가 세등분해서 나눠가지면 학교의 모습은 바뀔거에요.
정말 내 자녀의 올바른 성장을 고민한다면 학부모가 이런걸 해야 할 것 같습니다.
학교 평가에 참여하시고 학교 정보의 열람을 요청하시기 바랍니다.
학교 행사에 참여하면서 공동기획을 요청하세요.
교육과정도 교사만 기획하지 않도록 문을 열라고 요청하세요.
부모님은 교육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학부모의 성장을 위해서도 뭔가를 해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학교가 변할 수 밖에 없습니다.
최근에 교과부가 학교의 다양화 시도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학교가 다양화 되려면, 학교철학이 다양화 되어야 합니다. 교육과정도 다양화 되어야 하구요.
그리고 학생 문화와 학부모 문화도 다양화 되어야 합니다.
이렇게 다양화 될려면 학부모가 요구하셔야 합니다.
공립학교는 왜 다양하지 않습니까? 학교의 교육이념과 철학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금 고등학교의 운영권은 약 60%가 교장에게 있습니다. 교장이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어요.
교장이 자율권을 가지고도 다양하게 하지 않습니다. 학부모들이 요구해야 합니다.
교사들이 창의적 수업을 왜 하지 않습니까? 학부모들이 교육과정 편성의 다양화를 요구해야 합니다.
세번째, 학교 만족도 요소를 다양화 해야 합니다.
지금 교과부는 학업성취도에 대한 만족도를 위해서 일제고사를 치르게 합니다.
그런데 아무리 일제고사를 치르게 해서 성적이 올라간다 하더라도
학업성취도에 대한 만족도는 10%밖에 되지 않습니다. 제로섬 게임입니다.
교과부의 정책목표 달성 자체가 어렵습니다.
학생과 학부모의 만족도를 올리기 위해서는
학업성취도 뿐 아니라, 삶의 풍요로움과 학교의 즐거움, 심리적 지지가 더불어 있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학부모가 요청해야 하는 거에요.
네번째, 교육과정 운영이 변해야 합니다.
체험활동과 텍스트 학습이 결합되어야 합니다.
협력적 학습을 자극하는 주제학습, 깊이 있는 탐구학습이 되어야 합니다.
이런 아이들은 주제 있는 어려운 책을 잘 읽기도 합니다.
교과간 통합적 학습이 되어야 하고, 다양한 자치활동을 해야 합니다.
그렇다면 이우학교는 어떤 실험을 하고 있는가?
이우학교는 수능과 관련없는 교과가 전체 1/3을 차지합니다.
체험활동과 사회참여 교과가 많습니다.
예를 들어, 국어시간에 스스로 대본을 써서 연극을 하는 것이 교과과정이 될 수 있습니다.
농촌봉사활동도 2학점의 정규 교과 과목입니다. 아이들이 새까맢게 타서 오지만 값진 경험을 하죠.
학부모가 교과포럼을 통해서 교육과정 결정에 참여합니다.
이런 이야기를 함께 나누다 보니까 부모가 집에서 아이들의 학습에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알게 됩니다.
수업을 공개하고, 수업연구회에서 교사가 동료의 조언을 통해 성장할 수 있도록 합니다.
아이들은 헤비타트, 인권동아리 등 다양한 동아리 활동을 열심히 합니다.
왜, 이우학교는 사교육을 금하는가?
아이들은 여러사람과 관계를 맺으면서 관계 속에서 상처도 받고 관계를 맺는 과정에 자기를 절제하면서 성장을 하는건데,
사교육에 의존하게 되면 관계 맺을 시간이 부족하니까 유기적 성장이 불가능합니다.
사교육에 의존하는 것은 기계적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사교육은 '학습' 중에 '학'만 많이 하고 '습'을 할 기회가 없어요.
그리고 지식의 양이 중요하지 않기 때문에 사교육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지식의 양이 적더라도 심도와 지속성이 있다면 그 자체가 지적인 힘이 훨씬 더 커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깊이 사유하다보면 차원을 넘나들어서 국어든 철학이든 다른 학문으로 연결되는거죠.
어떤 학교가 좋은 학교일까요?
실패 경험을 자극하는 학교입니다.
공공하는 체험이 풍부한 학교, 다른 사람을 위해서 뭔가를 해보는 것입니다.
철학하며 존재에 대한 질문을 던지는 학교입니다.
사회에 대한 온갖 질문을 던지는 학교입니다.
이런 학교가 사교육없는 학교의 원형질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지만 현재 사교육없는 학교에 많은 예산이 투자되고 생산성이 올라간다 한들
대학을 바라보는 관점이나 내 삶을 바라보는 관점이 바뀌지 않는데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사교육없는 학교란,
사교육의 욕망을 실현해주는 학교가 아니라
'삶'과 '배움'의 성찰을 통해 공공적 학교 문화를 고민하는 학교입니다.
여러가지 기법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것도 옳지 않습니다.
미래적 교육신념
저의 믿음입니다.
성적 좋은 사람이 세상을 바꿀 가능성은 낮습니다.
성적은 평범한 상류층으로 가는 티켓에 불과하지 않을까요.
상류층으로 가는 것도 필요하겠지요.
그러나 저는 교육이 자기 존재 가치를 높이는 차원이라면
자기의 행복 뿐 아니라 사회적 행복에도 공헌하는 사람이 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시입니다.
조형미의 '탈선' 중에서.
'줄을 벗어 났으니
광막한 공간이 나를 품어 줄 것이다.'
탈선해라, 줄을 벗어났다고 해서 불안해 하지 마라는 것이죠.
그럴려면 학부모가 바뀌어야 합니다.
탈선을 원하신다면 역방향의 학부모가 되면 됩니다.
학교의 현실은 그대로이지만, 내가 변하는 것입니다.
박범신 작가의 더러운책상이라는 소설을 보면 주인공이 출세하기 위해서 열심히 공부를 하는데 그 책상을 일컫는 것입니다.
깨끗한 책상은 그와는 조금 다른 책상이겠죠.
우리 아이의 책상은 더러운 책상인지, 깨끗한 책상인지...
부모인 나의 인간자본, 가치체계는 어떤가요?
부모가 가진 경제적 가치보다 이런게 더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아이가 나를 보고 닮을 만 한가요?
그 어떤 환경보다 부모인 내가 가장 중요합니다.
교육은 직선일 수 없고 곡선이어야 합니다.
교육은 삶의 철학에서 출발하기 때문에 '곡선의 말'들이 훨씬 많아야 합니다."
그 어느 때보다도 한마디 한마디 새기지 않을 수 없는 강의였습니다.
공부가 삶의 가치와 철학을 동반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이 새삼 크게 다가왔습니다.
수직상승하려는 욕망의 실현 도구가 되어버린 교육 현실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안타까움이 더 커지기도 했구요. .
이수광 선생님과 함께 한 2시간이 책 두세권을 읽은 것처럼 묵직하게 지나갔습니다.
이제 던져진 과제는 공교육에 대한 실망과 안타까움을 넘어
지금부터 학교와 어떤 관계를 맺고
내 아이에게 삶의 어떤 모델이 되어줄지
나 자신부터 돌아보는 것이 아닐까요.
줄을 벗어나면 드넓은 세상이 나를 품어줄 터이니, 용기를 내어 한발 내딛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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