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춘수님의 <꽃>은 언제 처음 알게 되었는지 기억나지 않지만, 상담을 전공하면서 더 특별하고 의미있게 내 마음에 살아있는 시다.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우리들은 모두 무엇이 되고 싶다...”
상담을 하면서 내가 이 아이들에게 무엇을 해줄 수 있나에 대해 종종 생각하곤 한다. 유달리 온화하고 포근한 성격도 아니고, 남달리 지혜롭지도 않고, 특별히 긍정적이지도 밝지도 않은 내가 아이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나... 생각해보면 꼭 내가 훌륭하고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도 더 나은 가치와 의미를 말하고 또 그 방향을 가리킬 수는 있을 것 같다. 조금 더 먼저 배우고 경험하면서 알게 된 것들을 아이들과 나누는 거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먼저 아이들에게 해줄 수 있는 것도 점점 알게 되었는데, 그들 하나하나를 들어주고 알아주는 거였다.
상담실에 온 한 학생이 생각난다. 심리검사에서 우울점수가 약간 높아서 아이 상태를 점검해보기 위한 거였다. 겉으로 드러나는 큰 문제는 없었다. 무난한 친구관계, 중상위권의 성적과 무난한 학교생활, 대체로 일상적인 가정, 아주 눈에 띄는 수준은 아니지만 괜찮은 외모를 가진 아이였다. 그런데 심각한 정도는 아니지만, 조금씩 사는 게 힘들다고 했다. 그냥 평범하게 살아왔는데, 적응도 잘 안되고, 자신에게 자아정체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개선해야 할 것 같긴 한데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다며, 스스로 만족을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자신의 전부 다가 만족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이쁘지 않고 매력 없고, 친구관계도 별 문제는 없지만 겉으로만 관계하는 사이고, 특별히 잘 하는 것도 없고 이것저것 내세울 것도 없는 그냥 눈에 띄지 않는 그런 사람... 얘기를 나누던 중에 “내가 보기엔 넌 얼굴도 이쁘고 이미지 참 괜찮은데...” 라고 했더니 아니라고 하며 받아들이지 못했다. 사람들이 자신을 좋다고 하지도 않지만, 좋다고 해도 안 믿겨진다고... 남들에게 밉보이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많고, 그래서 편안할 때가 없었다는 아이였다.
내가 보기에는 여러모로 참 이쁜 아이인데, 안타까웠다. 자신에 대해 만족하고 있지 못하니까 다른 사람이 아무리 “너 참 괜찮은 사람이야”라고 말해줘도 믿을 수가 없었을 거다. 그 말을 간절히 믿고 싶으면서도 한편으론 저 사람이 아직 나의 진짜 모습을 못 봐서 저런 말을 한다고, 나를 정말 알게 되면 실망하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안 들키려고 자기도 모르게 뒷걸음치고 있기가 쉽다. 이런 얘길 했더니 그 아이는 나보고 어떻게 알았냐며 놀라워했다.
이 아이에게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할 수 있는 특별한 계기가 생기지 않는다면 겉으로 보기에는 무난하게 생활하는 듯 하지만, 자기 스스로는 늘 만족스럽지 않고 마음 가볍지 않은 상태를 달고 살게 될 지도 모른다. 공부든 뭐든 어떤 일을 해도 자기가 잘 해낼 수 있을까 싶어 주저하고 전전긍긍하다 정작 자기 역량을 충분히 발휘해보지도 못하게 되고, 원하고 바라는 게 있어도 자신이 그걸 가질 자격이 될까 싶어 망설이다 놓치고 두 번째나 그 다음으로 무난한 것을 선택하게 되는... 분명히 그런 삶을 살고 싶지는 않을 텐데 말이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자기가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은 아니다. 대체로 부모로 대표되는 중요 타인과의 상호작용을 통해서 내가 어떤 사람이라는 정보를 얻는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우리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들 중 의존과 사랑의 욕구(혹은 사랑과 인정의 욕구)가 필사적으로 작용하게 된다. 인생초기에 부모와의 관계에서 이 욕구들이 충분히 충족되어 만족감과 신뢰감을 가질 수 있게 된다면, 이것을 바탕으로 자기 자신과 타인 및 세상에 대한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본다. 아기가 배가 고파서, 아니면 몸이 불편해서 울 때 엄마가 와서 젖을 주거나 기저귀를 갈아주고 온화한 시선과 목소리로 살펴줄 때 아기는 만족하게 된다. 더 나아가 내가 사랑받는 존재구나, 가치있는 존재구나 하는 상이 마음에 심어진다. 만약 아무리 울어도 엄마가 오지 않거나 차갑고 날카로운 느낌을 받는 경험이 반복된다면 그 아기는 자신의 욕구가 타당하지 않다는, 자신의 존재가 무가치하다는 느낌을 갖게 된다. 이 느낌으로 아동기, 청소년기, 성인기를 계속 생활하게 되어, 자신감, 대인관계, 학업, 여러 영역에서의 수행들, 직업 등 많은 면에서 부적절감과 불만족감을 가지게 되기 쉬울 것이다.
생애 초기의 경험은 한 사람에게 세상을 보는 색안경의 빛깔을 결정한다. 이 색안경을 통해 보는 세상사, 다른 사람과의 경험, 그리고 거울에 비친 자기 자신의 모습, 이 모든 것들을 한 가지 색깔로 물들이게 되는 것이다. 새로운 안경을 찾아 쓰지 않는 이상 이 틀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다. 새로이 색안경을 고쳐 쓰는 방법, 즉 자신을 새로이 인정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자신의 부모님이 부모교육을 받고 더 적절한 부모역할을 하는 것, 종교적인 경험, 여러 간접체험 등을 통한 깨달음, 타인과의 새로운 관계경험을 갖는 것 등등.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해주고자 하는 것이 바로 마지막에 있는 방법이다. 아이들에게 신뢰할 수 있는 대상이 되어주려고 한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기 전에 우선 다른 누군가를 신뢰할 필요가 있기 때문이다. “너는 왜 자신을 못 믿니?”라고 다그칠 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 누군가를 신뢰해본 그 경험이 있어야 자기 자신을 믿을 수 있다는 거다. 나와의 관계경험을 통해 어떤 누군가는 나를 기존의 사람들과는 다르게 볼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해주고 싶고, 자신을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힘을 보태주고 싶다. 그래서 자신의 모든 것이 바람직하거나 괜찮은 게 아니라도, 자신의 모든 것을 좋아하고 받아들일만한 것임을 알게 되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자신을 사랑하고 인정할 줄 알게 되면 나 아닌 다른 사람도 더 쉽게 사랑하고 인정해주게 되는 아름다운 순환이 이뤄지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오늘도 내가 더 잘 듣고 더 잘 알아볼 수 있기를 바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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