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율곡선생의 사당이 있는 자운서원을 가 보았다. 옆을 지나다가 우연히 들른 것이지만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율곡선생 묘소와 신사임당 묘소도 있어 함께 참배했다. 조선 성리학의 거봉인 율곡선생이 그 곳에 잠들어 있을 줄은 몰랐다. 광해군이 내린 자운서원이란 사액과 함께 사당도 잘 조성되어 있었고 조경도 매우 뛰어나고 공간도 넓어 마음이 흡족했다. 걷는 즐거움에 더해 율곡선생의 생애를 생각해 본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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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운동하면서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고 하는 일이 수도 없이 일어난다. 만나면 반갑고 헤어지면 아쉬움이 남는다. 그저 단순한 만남과 헤어짐이 아니라 뜻이 같아 동지같은 걸 느낄 때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고 헤어질 때면 앙금도 남고 때로는 적의를 느낀다. 그럴 때면 슬픔이 오래간다. 개인간이 아니라 단체간에 일어났을 때에는 더욱 그렇다.

흥사단에 참여한 후 이어서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에 흥사단 대표로 참여해 약 2년간 활동했다. 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는 전교조와 참교육학부모회가 중심이고 고만고만한 교육운동단체 20여개가 참여해서 만든 단체이고 우리 교육의 문제점을 사회에 그런대로 제기한 단체이다. 이런 모임에 참여함과 동시에 학벌없는 사회에도 참여했다.

2000년 11월이었는데 그 단체는 출범은 1999년이고 2000년 9월부터 공식적인 활동을 했다. 나는 그곳에 공식활동한지 2달정도 후에 참여한 셈인데 이듬해인 2001년 4월에 분열되었고 학벌없는 사회만들기라는 단체를 5월에 새로 창립했고 이 모임 설립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그런지 8년이 된 셈이다.

학벌없는 사회가 공식활동에 들어간 후 이내 ‘학벌없는 사회’와 ‘학벌없는 사회만들기’ 두 단체로 나누어졌는데 두 단체 모두 우리 사회가 학벌사회라는 점을 우리 사회에 제기한 공로가 있다고 본다. 그 전에는 우리 사회를 학벌사회로 규정한 바가 없다. 그러나 그 이후로 학벌사회라고 하는 공론이 형성되었고 여러차례 세미나가 열렸으며 언론도 기사화했고 저서도 여러권 나왔다. 물론 이제는 학벌사회라는 말을 일반사회와 지식인들이 스스럼없이 사용할 만큼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학벌사회를 시정하기 위한 대안에 합의가 이루어졌다거나 치열하게 고민한다거나 사회적 추동력을 얻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 그런지 학벌사회라는 말에는 쉽게 공감하면서도 그를 시정하기 위한 노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다들 공범들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아니면 우리사회를 진단하는데 미숙하기 때문일런지도 모른다.

교육운동하면서 단체에 가입해 활동한 건 얼마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흥사단 활동을 중지한 것도 마음에 앙금이 남고 교육개혁시민운동에서 손을 뗀 것도 그렇고 학벌없는 사회가 분열한 것도 오래동안 걸린다.

특히 학벌없는 사회와 학벌없는 사회만들기로 분열할 때 파열음은 매우 컸다. 다 같이 학벌없는 사회만들자고 의기가 투합했음에도 불구하고 불과 4개월만에 두조각이 나면서 서로를 못볼 상대로 대하게 되기까지는 인간적인 고통이 따랐다. 몇 달을 두고 인터넷상에서 싸움이 그치질 않았고 인신공격도 서슴지 않았다. 이미 오래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그 여파가 아직까지도 가고 앞으로도 언제 활화산처럼 타오를지 모른다.

교육운동진영에서는 알 사람들은 다 알고 있으며 안타까워 하는 바이지만 그렇다고 중재도 어려워 보인다. 단순히 인간적 감정에 그치는 것만이 아니라 정책과 비전 그리고 이념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학벌없는 사회'는 독일식 사회주의를 지향하고 교육에서도 평등주의를 강조하고 있다. 반면에 '학벌없는 사회만들기'는 미국식 자유주의를 지향한다. 이런 차이가 초중등교육에서는 드러나지 않고 별 차이도 없다. 그러나 고등교육에서는 여실히 드러난다. 즉 우리나라 고등교육체제를 어느 방향으로 끌고 갈 것인가 하는데서 이견이 드러나는 것이다. 학벌사회를 해소하기 위해서 고등교육을 미국식으로 할 것인가 아니면 독일식으로 할 것인가 하는데서 결정적인 차이가 드러나는 것이다.


고등교육을 크게 나누면 미국식과 독일식으로 나눌 수 있으며 영국이나 일본이나 우리나라는 절충형이다. 즉 미국식과 독일식이 함께 섞여 있는데 이는 그런 절충식이 이론적으로 정립된 것이 아니라 역사적 현실에서 수동적으로 생겨난 것이고 그만큼 이론적 정리가 되어 있지 않다는 뜻이다.

과연 학벌사회를 해소하기 위해서 미국식으로 고등교육을 시장에 맡기고 정부는 관여하지 않는게 좋을까 아니면 시장에서 맡았던 부분까지 정부가 흡수해 정부주도로 운영하는 것이 좋을까. 이 부분의 차이는 매우 크다. 그러나 합의가 어렵다. 왜냐하면 이념이 다르기 때문이다.

자유주의와 평등주의는 물론 함께 가야 한다. 그러나 서로의 지향점이 다른 이상 모두를 하나의 사회가 함께 같은 비중을 두고 수용하기는 어렵다. 일정부분 상대의 이념을 침식하면서 자기주장을 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런 이념적 대립은 정답이 있을 수 없는 철학적 문제이기도 하다. 단 어떤 사회를 두고 말할 때 그 사회의 기반이 무엇이었는가를 인정한다면 그에 비추어 선택을 할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것도 그 사회의 기반을 문제삼기로 하면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다.

우리나라는 자유민주주의에 기반을 두었고 그것은 시장경제와 자본주의를 동반한다. 따라서 우리사회가 무엇을 기반으로 해서 성립되었는가 하는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다. 그렇지만 건국한지 불과 반세기가 조금 넘었고 그 전의 체제는 우리 국민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았었으니 말할 것이 없다. 그렇다면 불과 반세기의 역사를 가지고 우리 사회를 규정지을 수는 없지 않은가 하는 반론이 성립할 수도 있다. 또 한반도의 나머지 반은 의심의 여지 없는 사회주의국가이기도 하다.

'학벌없는 사회'의 주장은 이런 전제에서 대학에 대해 국가경영을 주장한다. 우리나라 국립대학이 20%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는데 기회가 되는 대로 늘려 궁극적으로 완전국립대학체제를 완성하자는 것이다. '학벌없는 사회만들기'는 정반대이고.

이런 이념적 대립이 함께 하는 동지들 사이에서 일어났고 급기야는 얼굴을 붉히는 사태로 까지 발전하더니 두조각이 났고 이제는 타인보다도 먼 사이가 되고 말았다. 좋게 보면 모두 우리 사회를 위해서 한 일이지만 방향이 다르다 보니 이런 지경에 이르게 된 것이다. 이런 싸움이 그래도 우리 사회를 발전시키는데 초석이 된다면 그래도 참을 수는 있다. 그렇지만 그런 생산적인데 기여하기 보다 소모적이고 퇴영적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이견이 있어도 상대방을 존중하고 최종적 선택을 사회에 맡기고 그 결과에 승복하면 어떨까. 적어도 학사만(학벌없는 사회만들기)은 그럴 용의는 있다. 사회가 선택하는 것을 거부할 수도 없으려니와 사회발전을 목적으로 하면서 사회의 선택을 존중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그때까지 사회가 잘 선택할 수 있도록 자료를 제공하고 공론의 장을 만들고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하도록 분위기를 조성하는데 노력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이런 논리도 패배를 예상하는 쪽에서는 수용하지 않으려 한다. 만일 승리를 예상한다면 수용할 것이다. 그러나 패배를 예상한다면 어떤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저지하려 할 것이다. 우리 사회의 기본 구성원리인 다수의 의사와 절차적 민주주의도 그럴 경우 무력해지고 만다.

고등교육체제를 국가가 경영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시장에 넘길 것인가 하는 주장의 차이가 두단체로 분열하게 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동지를 적으로 만들었으며 인간적 갈등을 야기했다. 이념이 무엇인지.(이 글은 몇년전에 쓴 것인데 그때 느낀 감정이 지금도 여전한 것같고 문제도 여전히 남아 있고 시차도 느껴지지 않아 다시 올려본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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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과 수업할 때 내가 들려주었던 내 인생 이야기 두번째 것입니다... 뭐 자랑할 일도 아니고, 이상하게 꼬인 인생이지만, 그런 꼬인 인생을 통해 새로운 길이 열리고, 그것을 통해서 교사가 되고, 오늘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돕는 자리에 있다 생각하니, 지금의 삶을 함부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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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박정희 대통령


내가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인생은 한번으로 족하다. 지난 시절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내 인생을 다시 살라고 하면 나는 반복할 자신이 없다. 10대 때는 10대 대로, 대학 다닐 때는 대학 때대로, 그리고 결혼해서는 결혼해서... 쉼 없는 인생이 자주 고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라는 가정을 하지 않고 “인생은 한번으로”라고 말하는 것은 고달픈 인생살이지만 그 속에서 내가 얻은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알고 사랑하고 그것을 통해서 인생을 알아 가는 것, 그것은 생의 어떤 다른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이었다.

 

또한 즐거운 인생을 산 사람에게 “인생은 한번으로 족하다”는 말이 비관주의적으로 들리겠지만, 고생스럽게 인생을 산 사람에게 그 말은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라는 말을 했던 전혜린 식의 생에 대한 감사가 담긴 것으로 이해되어야한다. 인생 새옹지마라고 아이들에게 내가 가끔씩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해주는 이야기를 오늘은 하고 싶다.

 

어린 시절 지독히도 가난하고 고통스러웠던 지난 날, 학교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던 중학교 3학년 어느날, 담임 선생님이 불쑥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금오공고를 갈 사람들 신청하기 바란다.” 금오공고는 7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 구미에 세운 공고로서, 기숙사비, 학비, 졸업 후 취직이 완전 보장되는 곳으로 내가 중 3때부터인가 처음 학생을 뽑는 신설학교였다. 그리고 한 학교에서 상위 2-3% 한 명만 추천이 가능한 공고였다. 돈 없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게는 정말 꿈같은 곳이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신청을 했다. 가난한 가정, 전망 없는 고통스러운 가정사를 벗어버리고 그렇게 국가에 의지해서 내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다. 다행히 뼈빠지게 공부한 덕에 성적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나이였다. 66년 3월생까지가 신청자격이 있었는데 나는 정확히 6개월이 부족했다.  내 나이가 원래 64년생이나 초등학교 가기 전, 62년으로 호적에 올라와 있었고, 그것을 고치라고 고향 분에게 부탁했더니 면사무소에서 똘똘치 못하게 정리해서 결국 66년으로 주저 앉아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결정된 내 주민등록번호 660***. 그것은 동생의 생일이었다.

 

나는 고민했다. 6개월 갭. 이 고생스러운 시간을 돌파할 수 있는 해방의 기회가 6개월의 차이로 날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와 의논하여 편지를 썼다. 그때를 생각하면 내가 왜 그랬을까 참 황당하기만 하다. 물론 어머니의 강요도 한 몫 했지만 여하튼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박정희 대통령께 편지를 썼다. “대통령 각하... 공부를 하고 싶어도 가난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는 학생입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세우신 공고에서 공부하고 싶으나 나이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선처 부탁합니다” 등의 내용이었다. 편지를 부칠 때 송인수 “올림”으로 해야할지 “드림”으로 해야할지 고민하다가 고쳐 쓴 것까지 기억나는 것을 보면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나 보다. 그리고 한동안 시간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수업 중에 학교 사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저 선생님, 송인수 학생 교무실로 보내 달래요.” 영문을 모르는 나는 사환을 따라 교감 선생님 앞에 섰다. 교감 선생님은 처음에는 어이가 없이 웃다가 나중에는 화를 내시면서 “이 편지 네가 썼냐”고 호통을 치셨다. 나랏일에 바쁜 분에게 사사로운 편지를 보냈다고 청와대 비서실에서 징계를 명령하여 강원도 교육청, 원주시 교육청, 우리 학교로 공문이 이첩되어 내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달 동안 반성문을 썼다. 다시는 이렇게 사적인 문제로 대통령을 불편하게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결국 나는 원서를 신청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 대신, 함께 희망했으나 나보다 등수가 다소 낮아 대기 중에 있던 엄무용이라는 친구가 추천되었고 그 아이는 당당히 합격하였다. 졸업식 날, 그 친구는 멋있는 금오공고 제복을 입고 학교에 와서 담임선생님 앞에서 거수경례를 하였다. 나이만 아니었다면 그 친구가 서있는 저 자리에 내가 서 있어야 했고, 저 친구가 입고 있는 멋있는 제복을 내가 걸쳐 입고 있을 수 있었는데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고 기가 막혔다. 내 인생이 왜 이다지도 풀리지 않는지 참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장학금 혜택 때문에 1류 고등학교인 인근 원주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재단이 같은 고등학교인 대성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기간. 내 인생의 가장 힘겨운 시간이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 부모님의 불화와 경제적인 고통, 그리고 일년 지각을 몇 십 회 할 정도의 닭장사 일. 집이 가난하여 제 때 빛을 갚지 못해 씨돼지를 잡아가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오열하시는 어머니를 따라서 서럽게도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지금도 잊지 못하는 고등학교 1학년 5월. 어버이 주일에 중고등부 대표로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를 전체 교인들 앞에서 읽다가 감정에 복받쳐 흐느끼는 내 모습을 보고 함께 우시던 많은 집사님들... 어느 추운 겨울, 나는 동네 언덕에 올라 기드온 성경 표 2 쪽에 우리 가정을 힘들게 한 사람들, 가난, 운명에 복수하기 위해서 법대에 가리라 맹세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글을 썼다. 지금도 싸-하니 되살아 오르는 아픔.

 

특별히 달라질 것 없는 고단한 인생살이였기에 고등학교 3학년 때 찾아온 육군사관학교 지망의 기회는 또 다른 해방구였다. 육군사관학교는 금오공고와는 비할 수 없이 좋은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육군사관학교의 제복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나의 살던 고향 원주는 1군 사령부가 있는 곳. 대령, 중령 등은 지천에 깔렸고 가끔씩 지나가는 장군들의 검은색 군용 자가용은 정말 대단한 위용이었다. 그러니 일병, 이병은 인간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학생회는 학도호국단으로 편성되어 점심시간마다 6.25 시가행진을 대비하여 분열 연습을 하였고 그때 연대장 대대장 친구들이 헌병들처럼 바지에 스프링과 구슬을 넣어 찰랑찰랑 거리는 소리를 내며 금색 손잡이에 은색 찬란한 군도를 차고 다니는 모습은 너무도 부러웠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나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나이가 다시 문제가 되었다. 고민... 아 내 인생은 왜 이리 풀리지 않은 것일까. 겁 많고 소심한 나였지만, 이 운명의 도전 앞에서 어머니는 그냥 주저 않지 않게 했다. 이젠 내 스스로가 지금은 문제 앞에 그냥 주저앉지 않게 되었지만, 그런 습성은 아마 그때 어머니의 덕을 많이 본 것 같다. “인수야. 우리 나이 고치자.” 이런 어머니의 말씀으로 나는 치아를 통한 연령 증명 진단서 등 무려 50여가지 정도의 서류를 다 갖춘 후, 우리는 여름 방학 고향인 충청도 홍성 지원에 나이 정정 재판신청을 했다. 어느 날 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던 나에게 편지가 날아왔다. 패소 판정. 날벼락 같은 통지였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기까지 부딪혀보리라. 다시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판사에게 보냈다. 나의 딱한 사정을 구구 절절 정리하여... 그리고 답장. 반가운 마음에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열어보았다. “학생의 딱한 처지는 이해가 가나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으니 상급법원에 상고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결국 사범대학에 진학했다. 사대는 내가 원한 곳이 아니라 가난과 점수와 또 우리 시대 학력주의의 힘을 벗어나지 못한 평범한 학생으로 불가피하게 선택한 곳. 어차피 군대는 가야하고 그래서 2학년 때부터인가 ROTC를 신청했다. 이번에는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학군단장에게 아예 나이와 관련하여 사전 내락을 받았다. 마라톤에 일등을 하는 등 신체검사를 우수한 등급에 통과하였으나, 역시 나이로 인해서 ROTC 지원에 실패했다. 이번에는 국방부에서 거부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군대를 면제받고 말았다. 가난한 가정, 몸이 불편하신 부모님... 내가 군대를 가면 서류상 우리 집에 부양능력을 가진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실제적으로는 동생도 부양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나처럼 2년 늦게 호적 나이가 기록되어 있다)  얻어진 의외의 판정이었다. 춘천 입영 검사소. 군대 가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수 백 명이 줄 서 있는데 나를 비롯해서 여섯명의 면제 후보자들이 미리 심사를 받았다. 무학자(無學者) 2명, 수형자(受刑者) 3명 그리고 나. 대학 재학생으로 그들과 함께 면제 판정을 받는 나를 검사관들은 이해할 수 없어 했다.

 

그 덕에 나는 어쨌든 내 모든 사회적인 경력에 2년의 덤이 붙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체력검사에서 유리할 정도 밖에 없었는데, 남보다 교직을 2년 일찍 시작한 셈이고, 군대 안 갔으니 2년 더 많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던 셈이고, 남들이 정식 퇴직할 나이에 돈 받고 명퇴 신청을 할 수도 있다. 물론 내가 그때까지 교직에 남아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내 인생을 회고하면서 생각해 본다. 내가 만일 그때 금오공고를 갔었다면, 육군사관학교를 갔었다면... 인생에 있어서 “만약”은 없고, 그때 그 인생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겠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즐기고 있는 교사로서의 삶은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이들, 기독교사운동, 좋은 선생님들과의 만남, 그리고 하나님...

 

그때 나는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풀리지 않는가 고민하였지만, 인생이 가장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시기, 내 인생의 위기의 시기가 실제로는 위기가 아님을, 그리고 내가 가장 원하는 일이 성취된 때가 인생 전체의 여정 속에서 볼 때는 성공이 아닐 수 있음을 온 몸으로 느끼곤 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지금 경제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 절망 속에 있는 아이들에게 가끔씩 해주곤 한다.

 

나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성공의 평가를 “네가 평생 몸 담아온 직업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가”라는 물음으로 내리는 것이 정확하다고 본다. 운동 선수 중에서는 이런 대답에 ‘예스’라고 대답한 대표적인 사람이 “차범근과 강만수 감독”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아들 여명이, 둘째 민서가 나처럼 교사가 되어도 좋으냐고 자문해 본다. 그 질문에 내 대답은 “absolutely yes!"이다. 그냥 봉급쟁이 좀스러운 교사가 아니라, 아이들을 통해서 시대와 민족과 교회를 품는 기개 있는 교사. 내가 존경하는 김교신 선생님처럼, 그렇게 신앙과 교육과 인격과 정의가 어우러진 빛나는 인생을 사는 교사,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온전히 쓰임 받는 기독교사! 내 아들이 그런 교사가 되어 주면 좋겠다. 이렇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을 보니 나도 조금은 내 인생에서 성공을 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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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운 것

교사로 살며 가장 두려운 것은,
가르칠 기력이 쇠약해지는 노화나,
생각과 처세에 뒤쳐지는 삶이나,
군색해지는 살림 걱정이 아니라,
반복으로 인해 무뎌진 마음이다.

무관심과 타성으로 이끌어가는
상상력이 사라진 일상을 뒤집고,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다는 무표정으로
내 앞에 선 아이들의 타성을 뒤집고자,
가까스로 찾아낸 새로운 가르침의 실마리.

왜 굳이 그렇게 유난을 떠냐는
은근히 불편한 시선에도,
아이들의 환호와 영혼의 떨림이
이끄는 대로 가파르게 달려온
이 익숙치 않은 외길이,
이젠 더 이상 떨릴 것도
감흥이랄 것도 없는,
매년 반복되는 익숙한 일상으로 잡은
어색한 무감각.

선생으로 살며 가장 두려운 것은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린,
그 옛날 흥분되었던 일을,
식어 버린 마음으로 오늘 또 다시 반복하는
괴로움, 괴로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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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로고에 있을 때 아이들에게 들려주었던 내 삶의 이야기이다. 그때 마음으로 10편 정도를 죽 쓰리라 생각했는데, 결국 두편만 쓰고 나는 학교를 그만 두었다.  내 이야기를 수업시간에 들으면서, 자기의 아픈 삶을 위로받은 그 모습이 눈에 밟힌다. 나는 언제 못다한 내 이야기를 풀어낼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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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키우기는 가난이 더 좋다." 어느 날 전철 안에서 신문에 실린 자녀교육도서 서평 헤드라인을 보자 눈이 번쩍 뜨였다. 워낙 없이 살아서 늘 쫀쫀했던 나는 결혼한 후, 아이에게 장난감 사주는 문제로 아내와 티격태격하다가 나름대로 합리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아내에게 자주 밀리던 참이었다. 그러다가 내 입장을 지지해주는 책을 만난 반가움이란! 그러나 그것보다도 더 근본적으로는, 내 인생을 설명하는 것 같은 책 제목이 가져다주는 친숙함이 그 기사를 더 주목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인생 어느 한 때인들 그렇지 않은 때가 있겠는가만, 그래도 그 중 가장 어두운 시기를 말하라면 내 경우에는 10대 시절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TV에서 비치는 행복한 가정의 모습은 상상 속의 모습이지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는 결혼식도 치르지 않고 남편에 대한 애정 없이 평생을 살아오셨다. 경제능력이 없고 주색잡기로 가산을 탕진한 아버지 대신 어머니는 집안 경제를 책임지셔야했다. 당시 보수적이고 변화에 둔감한 시골에서 옷장사, 떡장사, 문방구 등은 남자라도 상상할 수 없었던 일이었으나, 어머니는 닥치는 대로 일을 하셨다. 그러나 그때마다 늘 터지는 부부간의 갈등으로 수개월을 못 버텨 도중에 그만둔 일이 한두가지가 아니었다.

어머니가 아버지 역할을 하게 되니 집안 일은 자연히 장남인 나의 일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인가 5학년 때부터 나는 집안에서 밥짓기를 시작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닭장사"를 시작한 후 3년째인 중학교 때부터는 나는 본격적으로 어머니의 동업자로 나서기 시작했다.

중고등학교 시절,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서 20-30리 길을 자전거를 몰고 다니며 100kg이상의 닭을 실어 날랐다. 그 4-5년의 기간은 차라리 악몽이었다. 동네 아이들이 모두 모여 등교 버스를 기다리는 아침 시간, 나는 그 무거운 닭짐을 실고 똥 뭍은 옷차림으로 내가 좋아하는 여자아이들도 있을 학생들 숲을 지나가야 했다. 그러나 그런 부끄러움도 참을 수 있었다. 내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부러웠던 것은 다른 가게 아저씨들이 타고 다니던  '오토바이'였다. 나보다 힘이 훨씬 센 아저씨들이 오토바이로 빠르게 뒤쫓아와 일찍 닭을 사서 비탈길을 힘들이지 않고 올라가는 모습은 정말 눈이 뒤집힐 일이었다.

절대시간이 부족했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나는 늘 괜찮게 공부하는 축에 속했다. 머리가 좋아서라기보다 공부는 나에게 생존이었기 때문이다. 공부를 안하면 평생 닭장사로 자전거 타고 다니며 인생을 끝내야한다는 두려움, 이 지긋지긋한 노동을 그만 둘 길은 오직 '공부' 밖에 없다는 생각뿐이었다. 여기에다 어머니의 위협도 한몫 단단히 했다. 어머니는 가끔 불안한 성적이 나올 때마다 "너 성적이 떨어지면 너희들 고아원에 보내고 나는 다른 곳으로 가련다"는 말씀을 하셨다. 그 말씀이 너무도 예리하게 나를 아프게 했다. 어머니의 말씀은 단순한 위협이 아니었다. 실제로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집안이 가난해서 선명회(지금의 world vision)을 통해, 어머니는 나를 미국으로 입양 보내시려고 했다. 밤에 나에게 양 부모님께 편지를 쓰라고 편지 내용을 불러주시면서 눈물을 흘리시던 어머니... 그 후 다행히 양부모들이 거부해서인지 한국에 남아있게 되었다. 그러나 "해외입양"도 생각하신 어머니였기에 어머니가 "고아원" 운운하실 때마다 빈말이 아니라고 생각했고, 이런 공포감은 중학교 기간 동안 내내 공부에 대한 중압감이 되어 나를 힘겹게 했다.

나는 학급에서 왕따 당하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유난히 많은 편이다. 어린 시절 나도 마을에서 "왕따"를 당했기 때문이다. 나는 그때 나에게 "마담"이라고 별명을 붙여서 10대 기간 내내 동네 아이들로 하여금 나를 놀리게 만든 "강길호"라는 친구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나는 아이들에게 놀림을 받고 언덕에 올라서 혼자 눈물을 흘리며 참 많은 상상을 했다. 그리고 강길호에 대한 분노. 그래도 그 속에서 나를 위로해준 생각은 "강길호는 나중에 죽어서 천국에 갈 수 없는데 나는 간다"는 그 한가지 점이었다.

아이들이 나를 싫어했던 이유는 확실치 않다. 전후 상황을 가지고 추측하건데, 공부 잘하고 어머니 도와서 열심히 일하는 나를 동네 어른들이 자식들을 꾸지람할 때마다 자꾸 들먹였던 것 같다. 거기에다가 집안 일 때문에 아이들과 잘 어울릴 시간도 없었고, 그럴 시간이 있었어도 집안 분위기로 어두워진 성격  탓에 어울리지 못하는 기질 탓도 작용했을 것이다.

우리 집에서 밤은 공포의 시간이었다. 내성적이고 나약한 성격, 똑똑한 아내로 인한 콤플렉스 등이 쌓여 아버지는 늘 밤늦게 만취한 상태로 귀가하여 거친 말과 폭력으로 의사표현을 하시곤 했다. 어느 날 아버지가 휘두른 몽둥이에 어머니가 맞아 무릎 뼈가 들어간 터라, 가족들은 늘 아버지의 비틀거리는 발걸음 소리에 예민해 있었고 여차하면 도망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이래 저래 아버지를 증오했다. 아버지 없이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지금 생각해보면 모든 것을 아버지 탓으로만 돌릴 수 없는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독히도 아버지를 미워했다.

시내에서 어머니와 장사하고 있었던 고 1 어느 날, 그때 비가 오고 있었다. 그날도 오랜 동안 집을 비우셨던  아버지가 장사하는 곳에 갑자기 술을 드시고 오셨다. 그 모습을 보고 너무도 놀라서 어머니는 뛰쳐나가시고 나는 순간적으로 분노가 폭발해 아버지를 향해서 돌진하며 그분의 두 팔을 잡고 외쳤다. "아저씨, 왜 이래요!" 이 한마디에 나도 놀라고 그 소리를 들은 아버지도 놀랐다. "뭐라고, 아저씨라고?" 지금도 나는 아버지의 그 놀라며 슬퍼하는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그만큼 아버지는 내 인생 속에서 지워진 존재였다.


또 한 장면이 생각난다. 그후에 우리 아버지가 가족들이 떨어져 살던 가게 옆 월세 방으로 찾아오셨다. 그리고 또 다툼이 시작되었다. 우리 집은 다시 쑥대밭이 되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싸움은 시작되었고, 나는 이제 도무지 그 광경을 참지 못했다. 내 마음속에서 순간적으로 아버지를 살해하고 싶다는 충동이 생겼다. 옆에 야구방망이가 있으면 아버지의 머리를 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차마 그러질 못하고 대신 나는 그 자리에서 발작했다. 어머니의 놀란 외침, 그리고 싸움은 중단되었다.

어린 시절의 아버지에 대한 내 생각에 변화가 찾아온 것은 내가 예수님을 만난 후부터였다. 교직생활 3년째였던 92년, 성경말씀을 통해서 나는 처음으로 하나님이 나를 사랑하시고 위로하시며 내 인생을 받아주심을 온 마음으로 느끼게 되었다. 당시 나는 아이들과 영어성경공부를 하고 있었고 그 주간에는 아이들의 구원의 문제를 성경을 통해서 풀어 주어야할 때였다. 더욱이 한 달 전에 한 선생님으로부터 내 신앙의 성경적 근거를 묻는 도전적인 질문을 받았던 터라, '구원'은 아이들의 문제가 아니라 내 문제가 되어있었다. 영어성경으로 로마서, 히브리서, 요한복음을 읽으며 나는 너무도 절실히 답을 구했다. 그러다가 디모데전서 1장 15-16절 말씀을 통해 나는 이 모든 부담으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말씀을 통해서 나를 만나주시는 하나님, 나를 받으시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움직일 수 없는 증거로 경험하게 되었다.

이런 경험이 있고 나서부터 나는 그토록 미워하였던 아버지를 용서하게 되었다. 그리고 "사랑은 단순한 느낌이 아니라 용서라는 적극적 행동"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의지적인 결단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마음 속의 분노가 봄철에 눈 녹듯이 사라지는 듯한 체험. 아버지의 60세 생신 무렵, 나는 요양생활하고 계신  아버지를 찾아갔다. 젊은 시절 방탕한 생활로 온 몸이 망가진 아버지. 나는 그분을 어느 강가로 모시고 가서 나룻배를 태워드렸다. "아버지, 어머니가 원망스럽지 않으세요." "아니, 뭘 내가 잘못해서 그렇지 뭐." 쓸쓸하게 쓴웃음 지으며 나의 시선을 피하시던 그 아버지의 늙고 병든 모습을 보면서 나는 아버지를 용서하며 그분의 인생과 화해하기로 했다. 그리고 숙소에서 내가 사영리로 전한 복음을 듣고 아버지는 신앙을 갖기로 하셨다.

교사가 되어 나는 갈등을 겪는 아이들에게 이 용서의 신앙을 알려준다. 그리고 늘상 담임생활을 하다보면 겪기 마련인 아이들과의 갈등이 있을 때마다, 나는 먼저 용서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틈나는대로 내가 믿는 하나님을 이야기해 준다. 물론 나도 공교육의 특징이랄 수 있는 "종교의 중립"을 모르는 바 아니다. 무턱대고 수업시간 잘라먹고 신앙을 강요하는 것도 아니다. 그러나 신앙 이야기를 일부러 피하지는 않는다. 꽤 학급운영을 열심히 해 아이들과 생활하는 것이 적지 않은 즐거움이었던 98년 말. 이제는 이 아이들이 내 손을 떠나 더 이상 돕고 싶어도 도울 수 없는 때가 가까웠다는 사실에 나는 못내 안타까왔다. 그리고 그것 하나만 있으면 인생을 꿋꿋히 살 수 있는 비결을 알려주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내 인생의 가장 소중한 이야기, 예수 그리스도 이야기를 한명 한명에게 들려 주었다.

그리고 그해 겨울 MT 저녁시간이었다. 서해안 관광농원에서 밤늦게 아이들과 공동체 놀이를 하다가 서로에게 격려의 글을 써주고 글 써준 사람의 이름을 맞추어 보는 게임 시간, 박상희라는 아이가 내게 써준 글이 나를 놀라게 했다. "선생님은 다 좋습니다. 그러나 전도하는 것은 싫습니다. 아이들이 지금 얼마나 싫어하는 줄 아세요." 그 아이의 이야기를 듣고 나의 진심을 아이들이 알아주지 못해 섭섭한 마음보다는 기쁨이 더 컸다. 참된 것을 이야기하다가 내 사랑하는 제자들에게 외면 당하는 것을 경험. 총각 때부터 늘 따라다니던 인기관리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고 진정 선생이 될 수 있었던 순간이었다. 그리고 사랑하는 제자들로부터 버림받으면서 고독한 길을 걸어갔던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던 소중한 기회였다.

어두운 이런 시절, 나는 가난 속에서 한순간도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런 예민함이 있었다면 살아갈 수 없었기에 나의 감성적 둔감함은 차라리 축복이라고 말해야했던 그 시절. 그러나 어린 시절의 어두운 경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불행에 빠진 아이들을 이해하고 위로하는 교사의 능력으로 변화되었다.

이번 구정 때 이집트 왕자 2를 보았다. 애꿎은 운명의 장난으로 이집트로 팔려간 요셉 이야기였다. "이 고통의 이유를 알고자 하는 마음도 내려놓았습니다. 왜냐하면 당신은 저보다 더 지혜롭기 때문입니다." 요셉이 감옥 속에서 부르던 그 독백의 곡조가 내 인생의 지난 시절을 노래하는 것 같아 나는 아들 여명이 몰래 눈물을 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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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12일 창립식 때 오신 분들에게 나눈 이야기이다. 이 짧은 이야기를 하기 위해 지난 1년 나는 참 힘겨운 시간을 건너왔다. 행사 준비로 분요하지만, 일을 하면서 마음 속에는 오신 분들에게 전할 말을 묵상하는 시간으로 가득했다... 새벽마다 기도하면서 내 속의 뜨거움이 사라지지 않도록, 내가 이 길을 가야하는지 모색하며 기도할 때 내게 찾아온 계시의 지혜를 잘 표현할 수 있도록, 그렇게 기도했다. 당일날, 강당의 높은 위치와 청중들의 앉은 자리 거리감, 그리고 어둔 조명으로 눈을 마주치지 못한 가운데, 교감의 어려움을 느끼는 그 마음으로 20분 강의를 했지만, 글을 쓰면서 마음 속으로 내가 진실을 담고 있음을 느꼈다...아, 이번 8월 달 기독교사대회 때 내 사랑하는 선생님들을 만나서, 내 속의 뜨거움과 내속의 아픔과 그 부르심의 역사를 전해야할텐데, 날마다 그래 거의 날마다, 나는 자격없는 사람이다, 나는 자격없는 사람이다, 은총이 없이는 나는 오늘 하루도 버틸 수 없는 사람이다, 그렇게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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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출범 행사 프로그램을 준비하는 모임 때 “참석한 여러분께 우리의 운동을 알리는 순서가 있으면 좋겠다... 이게 도대체 무엇 하자는 일인지, 운동의 취지와 정신, 사업 방향 등을 잘 전달하는 시간”을 갖자는 이야기가 있었고, 그 몫이 저에게 주어졌습니다. 그런데 당황스럽게도 그 과제를 위해 저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20분이었습니다. 지난 1년 간 이 일이 과연 내가 감당해야할 짐인지, 고민하며 괴로워했던 세월을 고작 20분 만에 이야기하라는 것은 가혹한 일입니다. 그것도 단지 정보만 주는 것이 아니라, 여러분의 마음을 얻어서, 이 일에 동참시키라는 것이니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요.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라는 새 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을 하자는 운동입니까? 사교육업자들과 대결하는 운동이 아닙니다. 이 전쟁터에서 살아남을 전사로 아이들을 길러낼 노하우를 제공하자는 운동도 아닙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아이들에게는 입시고통, 부모들에게는 사교육걱정을 주는 살인적 전쟁 자체를 끝내자는 운동입니다. 전쟁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체념하고 여기고 그 안에서 점진적 대안을 찾는 것이 아니라, 전쟁 자체를 끝내는 근본적인 운동을 하자는 것입니다.


이 운동은 전쟁을 유발하는 입시경쟁, 학벌, 대학의 잘못된 서열주의, 입시정책, 중등교육 질 문제, 간판 숭상주의... 등, 수십년 간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우리 숨통을 조여 온 이 괴물과 같은 것과 대항해 싸우겠다는 것이지요. 그러므로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도무지 풀 수 없는 것을 풀겠다는 무모한 운동입니다.


평시, 나는 다른 분들로부터 그렇게 무모한 사람으로 평가받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나는 성과가 나오는 일에 마음이 끌리는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나는 결국 이 자리에 서고야 말았습니다. 지난 1년은 이게 왜 내가 감당해야할 몫인지, 고민해온 세월이었습니다. 제 인생 전체를 걸고, 질문한 그 질문에 대해 대답을 찾다가 죽다 살아났습니다. 그래서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습니다. 그러나 2월 19일, 그날로 내 고민을 끝내고 나는 이렇게 여러분 앞에 서게 되었습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은 결코 실패할 수 없는 일이라 나는 확신합니다. 거대한 바위와 같은 문제와 씨름하지만, 나는 이 운동이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 믿습니다. 역사를 보는 안목은 없지만, 내가 1년 동안 고민하면서, 한가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사실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 시대 고통 받는 아이들의 문제를 풀기 위한 “신적 개입”이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그 신적 개입 때문에 이 운동이 실패하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앞으로 장래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아무도 상상할 수 없는 일, 사람들의 상식을 넘어서는 일들이 일어날 것입니다.


■ 수고와 희생으로 열리는 길


이 땅의 입시 고통과 사교육걱정, 여러분은 무엇이 문제이고, 그게 왜 안 풀린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들은 그렇게 이야기할 것입니다. 학벌, 대학서열주의, 간판, 체면 문화 등... 원인이 너무 복잡합니다, 그리고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거의 불가능합니다, 라고요. 그러나 저는 문제 해결에 있어서 과학적 접근만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저는 입시와 사교육 문제가 제대로 해결되지 않는 것은, 피해 당사자들이 이 문제에 대해 침묵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자기 문제를 자기가 풀지 않고, ‘정치권, 대학, 언론 등 힘 있는 곳에 의존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피해 당사자들이 서로 연대하지 않고, 서로 경쟁하며 고립된 상태에서 실패하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보십시오. 이 땅에 무고한 한 사람의 생명이 죽임을 당하면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를. 그가 죽으면 그 한 사람의 죽음을 헛되지 않게 하기 위해 ‘단체나 운동’이 출범합니다. 80년대 군부독재로 희생당한 대학생, 청년들의 죽음을 기억하여 (민가협이 만들어져 우리나라 민주화운동의 일익을 담당했습니다. 그런데, 한해에 200명 씩 벌써 지난 40년간 8000명의 아이들이 입시로 인해 자살하고, 부모들의 한숨과 신음소리가 이토록 깊은데, 입시 문제에 관한 한,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 세상을 바꾸는 순서

 

입시에 관한 한 우리는 우리 문제를 정치권에서 풀어달라고 말합니다. 정치권이 나서서 법과 제도를 바꾸어 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러다 안 되니, 해외로 나가거나 절망합니다. 물론 법과 제도가 바뀌면 세상은 한결 달라질 것입니다. 그러나 법과 제도는 매우 보수적입니다. 무슨 말인가 하면, 기존의 틀로 세상을 설명할 수 있으면 법과 제도는 절대 자신을 바꾸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기존의 법체계로 설명할 수 없는 현실이 생기게 되면, 처음에는 그것을 “불법”이라고 매도하다가 그런 현상이 많아지면 “예외”라고 말합니다. 그러다가 너무 예외가 많으면 할 수 없이 자신을 바꾸게 되는 것입니다.


정치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법과 제도를 바꾸는 권력의 힘 아닙니까? 아무리 진보적이고 개혁적인 정치일지라도, 현실을 기존의 질서로 설명할 수 있는 한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는 것입니다. 새로운 법과 제도가 하나 등장하기 위해서는 먼저 ‘새로운 현실’이 세상에 등장해야합니다. 그러나 그 ‘새로운 현실’은 어떻게 만들어집니까? 그것은 기존의 현실에 순응하지 않고 버티는 누군가의 실천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그런 실천이 없으면 새로운 현실이 없고, 따라서 새로운 현실이 없으면 새로운 법과 제도가 없는 것입니다.


이 말이 사교육걱정없는세상, 입시고통없는세상을 만들기 위해 오늘 모인 우리에게 무엇을 말합니까? 우리가 만들어야할 “새로운 현실”은 무엇입니까?


학부모에게 새로운 현실을 만드는 것이란, 승리가 보장되는 곳으로 자녀를 진입시키기 위해 내 인생의 중심을 잃어버리고, 내 믿음, 내 가치관을 다 버리고, 옆 집 이웃과의 허망한 경쟁에 더 이상 인생을 탕진시키지 않겠다는 결심을 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교사에게 새로운 현실이란 교사로서의 자존심과 존엄성을 잃어버리고, 아이들에게 경쟁 사회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입시 위주 교육을 하라는 요구에 더 이상 나는 그럴 수 없다고 버티며 거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사교육 업계에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새로운 현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더 이상 학원의 이익을 위해 근거 없는 ‘불안’으로 부모와 아이들을 힘겹게 하지 않겠다는 결심이요, 이 땅의 아이들에게 복된 날이올 수 있다면, 내 이해관계를 내려놓겠다는 결심을 의미합니다.


종교를 가진 이들에게 새로운 현실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진리를 따라 산다는 것은, 이 땅의 경쟁에서 승리하려는 시도를 내려놓고, 고통 받는 이들의 자리에 가서 그들과 같이 되며 그들을 위로하는 것이라는 것을, 삶으로 선포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렇게 사람들이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야 변화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물론, 입시고통과 사교육 걱정 문제는 풀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어려워도, 우리 문제가 미국의 흑백 차별 문제보다 훨씬 더 어렵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미국 사회는 상당한 수준 풀어냈습니다. 어떻게 풀어냈습니까. 물론, 루터킹 목사님의 희생을 떠올릴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러나 꼭 그런 초인적인 위대한 사람의 선택과 결정이 새날을 가져오는 것만은 아닙니다. 저를 비롯해 우리 모두는 그런 사람들이 아닙니다.


미국의 몽고메리주에서 시작된 흑백차별운동은 그 이름도 생소한 로자 파크스라는 한 흑인 여성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1955년 12월 1일, 대중 버스에서 흑인 좌석에 앉아 있다가, 백인이 앉아야하니, 자리를 비켜달라고 운전사가 말했지요. 그는 오랜 세월동안 그런 부당한 요구에 순응했습니다. 흑백차별의 무시무시한 관행과 제도, 그리고 그에 짓눌려 적응해온 세월... 그러나 더 이상 그녀는 그럴 수 없다고,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존엄성을 지키고 자기 자녀에게 새날을 주어야한다는 그 마음으로 부당한 요구에 굴복하지 않고 자기 자리를 지켰고, 그래서 범법자라 낙인 찍혀 감옥에 가게 되었고, 그 사건을 계기로, 그 유명한 버스 보이콧 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운동을 계기로 흑백차별을 폐지하는 수많은 항의운동이 일어났고, 그와 관련된 법률을 만드는 일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위대한 웅변과 사람을 이끌어내는 조직 능력은 없을지라도, ‘잘못된 관행’이 길을 비켜달라고 요구할 때, 아니라고 대답하는 그런 자세, 그로 인해서 감옥 가는 그런 자세가 새로운 현실을 만들어내는 것이고, 그래서 세상이 바뀌어지는 것입니다.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것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가, 그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세상의 모순을 풀어내기 위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해결책은 없습니다. 오직 길은, 그 문제를 가슴에 끌어 앉고 자기 생을 통해 대답을 찾는 그 사람 자신입니다. 그 사람이 곧 길입니다. 도무지 풀 수 없는 문제의 한 복판에서 고통받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 그것 자체가 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 앞으로의 계획


오신 분들 중 상당수는 사실, 이 운동이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겠다는 것이냐에 대해 더 궁금할 것입니다. 그것을 이야기할 시간이 없습니다. 한가지 확실한 것은, 이 운동을 소위 ‘소수의 교육전문가 운동’으로 혹은 ‘답을 제시하고 남들을 따라오게 하는 운동’은 하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다만, 고립된 채 아픔을 숨기는 사람들을 광장으로 끌고 나와서, 사실은 이 경쟁 속에서 아무도 진정한 승자는 없다는 그 숨겨진 진실을 폭로하고, 그 속에서 우리 모두가 아픔을 나누고 위로하는 일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경쟁의 상대가 아니라 문제를 푸는 동반자로 품도록 하는 일을 조직하려고 합니다.


대안을 만들는 일에 관심이 있지만, 우리가 대안을 만들어 제시하고 사람들을 견인해 나가는 것이 아니라, 모든 평범한 사람들이 대안을 찾아 나서도록 격려하고, 그 속에서 가장 생명력있는 대안이 채택되도록 대안을 만드는 길을 관리하는 데 관심이 있습니다. 그리고, 딱딱하고 고답적인 오프라인 중심 운동이 아니라 온라인운동도 가미하고, 또 가급적 재미있고 신나는 방식으로 일을 도모하고자 합니다.


이 일이 어떻게 될 것이라고 여러분은 전망하십니까. 잘 될 것인가요? 예, 저는 잘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그러나 뭔가 탁월한 전략이나 기가 막힌 아이디어가 있기 때문에 잘될 것이라 생각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그렇게 확신한 것은 아까 말한 것과 같이, 이 일이 신적인 계시가 임한 일이기 때문에 잘될 것이라 믿는 것이며, 이 일을 위해서 자신의 인생을 던지기로 결심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미래가 구체적으로 언제일지는 나도 모릅니다. 나도 그 약속만 붙들고 차출되어 나온 군인일 뿐입니다. 다만 확실한 한가지는, 우리가 이렇게 나서지 않으면 그 미래는 결코 앞으로도 오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입시, 사교육 문제 해결 계단이 총 100개라면, 나는 내 생애를 통해서 5개 정도 계단을 만들고 죽어야하겠다 그렇게 생각합니다. 또 다른 사람들이 내 등을 밟고 올라가 계단 만들고... 그렇게 해서 세월이 지나 계단 만드는 일이 완성될 것입니다. 일은 그렇게 이루어질 것이지, 한번에 달라지는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 사회 교육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문제 해결의 길은 어렵고, 그 어려운 문제에 자신을 던지기에는 자기 인생이 너무도 귀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마음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려운 문제를 상대로 싸움을 걸 때의 자세는 단 두가지입니다. 그것은 “자기 인생을 하찮게 생각하는 자세”, 내 인생은 아무 것도 아니니, 이 답이 안 나오는 일에 내 인생을 낭비하겠다는 마음입니다. 그리고 한창기 씨라고 뿌리 깊은 나무 편집자가 말한 대로, “가치있는 일을 위해 돈을 가랑잎 태우듯이 쓰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그 두가지면 되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어디 있냐고요? 이미 많습니다. 눈에 아무런 전망이 보이지 않는데도 함께 뜻을 모아 시간을 묻고 물질을 묻은 사람들이 모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분들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게 된 것입니다.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이 온전히 임할 때, 그날, 세상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생기게 될 것입니다. △하나는 외로이 땀 흘려 길을 만들어 온 지난 세월을 회상하며 감사해 하는 사람들이고, △다른 한 부류는 그렇게 길을 만든 사람들의 수고로 인해 혜택을 누리며, 그동안 수고한 사람들에게 고마워하는 사람들, △그리고 다른 한 사람들은 자신이 가진 재주를 다 동원해서 새 세상이 오는 것을 막기 위해 애쓰다가, 결국 찾아온 새 날로 인해 괴로워하고 부끄러워하는 사람들입니다.


그 셋 중에 여러분은 어디에 포함되길 원하십니까. 저는 저와 여러분이 첫 번째 사람으로 인생을 살아갔으면 하고 바랍니다. 오늘의 행사를 위해 아침마다 기도하면서, 저는 여기에 참석한 170분이 여러분이 내 속에 주어졌던 이 마음을 품고 돌아가기를 기도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여러분에게 꼭 이 운동에 돈이나 내는 후원자 정도로만 참여해 달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대중운동이니 우리는 정부의 손을 빌지 않고 대중들의 지갑에 의존할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만 있다면 이 일에 회원으로 후원자로 참여해주셨으면 하는 바램이 있습니다.


그러나 저의 요청은 그것을 넘어섭니다. 제가 참으로 원하는 것은, 이 괴물 같은 우리 시대 교육문제를 ‘더 이상 어쩔 수 없는 문제로 체념하는 마음을 오늘 이 행사를 끝나고 나가실 때 모든 분들이 내려놓고 나가달라는 것’입니다. 약속이 있는 일이지만, 행여 잘못되어 일이 실패로 끝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럴지라도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열매가 없어도 그렇게 아무런 결과도 얻지 못할 일에 자기 인생을 던지는 낭비가 아름다울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그렇지 않을지라도, 나는 내 아들, 여명이와 민서가 “아버지가 우리들이 살아갈 세상을 위해 모든 것을 걸며 살았다”고 기억해 주면 나는 그 한가지로도, 충분히 위로받은 인생이라 생각합니다.


그것이 어찌 저만의 마음이겠습니까. 그것은 사실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 땅을 살아가면서 가슴 속에 오랜 동안 묻혀 놓았던 소망이 아니었습니까. 그 꿈을 따라 산다는 것이 무모해 보여 주저했지만, 사실 언젠가 때가 되면 내 인생을 가치 있는 일에 던지리라는 마음을 품고 살아오셨을 것입니다. 우리 시대 역사가 어두웠던 지난 세월, 내 이익을 계산하지 않고 모든 것을 던져 새날을 가져왔던 그날 승리의 경험을, 오늘 이 한국 땅 사교육과 입시고통으로 신음하는 우리 아이들을 위해 또 다시 쏟아부어야하겠다는 그런 마음 때문에 오늘 이 자리에 우리가 참석한 것 아닙니까...


잘 오셨습니다. 부디, 이 생명에 찬 가치 있는 일에 우리 생을 던지며 함께 위로하는 그런 축복된 삶이, 저와 여기 참석한 모든 사람들의 생애 가운데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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되는 일이 없어서 마음을 짖누를 때, 회원들에게 쓴 편지... 2005. 3.8.이다. 아, 그때 한참 어려운 시기였었지...특히 일은 많아 간사를 구할 수 없었던 시절, 이 간절한 편지를 읽고, 남아공에서 몸이 아파 겨우 귀국한 서완실 간사님이 내게 메일을 보내서, 함께 일하고 싶다고, 선생님이 이 짐을 내려놓을 3년간 이 일을 돕고 싶다고 그렇게 해서 우리 사무실에 오게 된 계기의 편지이다. 그리고 그분이 오셔서 얻어진 3년은 참 축복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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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인수 편지] 선생님, 저를 꾸짖어 주십시오.

선생님. 오늘은 햇볕이 화사해 참 화창한 봄날입니다. 이제 곧 이곳 봉천 고개로 흐드러지게 필 3월의 개나리꽃을 생각하면 기분이 좋습니다. 선생님, 그러나 봄날답지 않게 오늘은 좀 제 마음 속에 있는 근심을 선생님과 나누고 싶어서 망설이다가 편지를 씁니다.

퇴직한지 이제 2년째 접어들고 있네요. 3년만 있으면 이곳 사무실에서 제가 총무로 일하는 기간도 끝나고, 새로운 부르심의 일터로 나서야할 것입니다. 95년부터 연합 사역을 시작했고 이제 10년째 접어드니, 참 오랫동안 일을 해온 셈입니다. 요즘은 걷잡을 수 없이 많아지는 흰머리 때문에 염색에 대해서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희어져도 절대 염색하지 않고 늘어가겠다고 호언장담하던 얼마 전 모습을 떠올리며 세월을 이기지 못하는 생각의 견고함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잠자는 것이 그렇게 쉽던 시절이 엊그제 같은데, 요즘은 기독교사운동의 현재와 장래에 대해 제 속의 아픔과 절망, 그리고 제가 가지고 있는 한계가 언뜻 언뜻 제 마음을 아프게 눌러 밤을 지새울 때가 있습니다. 98년 기독교사대회. 그때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지만 주님이 주시는 꿈이 내 영혼을 붙잡아 행복한 시절이었습니다. 주를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시절, 그때도 "네가 붙잡은 그 꿈이 이루어지겠느냐"는 주변의 냉소적인 이야기를 들었습니다만, 그때 새벽마다 주님이 주시는 위로로 견디며 살았습니다.

수년이 지났네요. 이젠 많은 분들이 이 운동에 관여하시고 운동이 교육계 안팎으로 어느 궤도에 올랐습니다. 그래서 시기로 보면 좋은교사운동이 이제 가장 활발하게 사역을 할 때인데, 정작 저는 많이 쇠약해져가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연합케 하신 축복을 담아낼 수 없는 제 한계 때문에 괴로웠던 지난 1-2년의 기억이 아직도 제 마음을 누르고 있고, 기독교사운동이 안고 있는 수많은 숙제들이 주는 중압감을 가슴 속 한 켠에 안고 살고 있습니다. 어서 빨리 이 짐을 내려놓고 싶은 심정...

지난 주일 오후에 교회 부부들과 성경공부를 하면서 제 가슴 속 아픔과 절망을 털어놓았습니다. 운명과의 싸움에서 굴복하지 않고 열심히 살아온 저라고 자부하지만, 그 자부심이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다는 사실, 기독교사운동을 향해 도전하는 영적 어둠, 패배주의는 열심히 일함으로 해소되는 것이 아니고, 오히려 열심히 일할수록 심화되는 모순이 아프게 다가왔습니다. 그 날, 함께 울며 기도하다가 문득 제 마음 속에 "나의 기도 제목을 선생님과 나누지 않고 무엇 하는가"하는 생각이 스치고 지나갔습니다.

여기에 요즘 사무실에 홍진아 간사 후임을 찾는 일로 고민하고 있습니다. 그분 후임 자리에 벌써 수많은 분들이 지원했지만 적임자가 없고, 적임자로 확정된 분들은 이상하게 다음 날이면 어김없이 출근할 수 없다는 통보를 하는 기이한 현상을 접하면서, 제 마음 속으로 뭔가 영적으로 이상한 느낌이 지나갔습니다. 더 무엇인가를 노력해서 될 일이 아니라는, 하나님의 도우심이 빠지고 일만 요란하게 돌아가는 공허함... 그래서 저는 밤새 고기잡이 헛수고하고 빈 그물로 돌아와 주님 앞에 선 베드로의 심정입니다.
몸이 약해져 교회 새벽기도를 자주 빠지고 이제 집에서 하는 아침기도로 저의 영적 건강을 겨우 겨우 유지하는 요즘, 돌아보니 10여년 전 매달 한번씩 밤이 맞도록 기독교사운동을 위해 철야 기도하던 시절이 생각났습니다. 어려운 영적 과제를 끌어안고 함께 기도함으로 돌파하던 시절의 감격, 기도 가운데 찾아오는 믿음과 용기, 그리고 새날에 대한 흥분... 그러나 이제 그 능력은 쇠약해지고 휴화산처럼 멈춘 기도의 자리를 수많은 영적 도전이 장악하려함을 느낍니다.

기독교사운동을 나의 운동으로 품고 새벽을 깨우는 이들이 어디 있는지 확인이 안되고, 제 약한 믿음으로는 도무지 감당하지 못할 영적 싸움 때문에 지쳐 있는 지금, 운동을 처음 시작할 때 경험했던 주님의 은총을 다시 새롭게 체험해야겠다 싶습니다.

언뜻 언뜻 "이 운동에 주인의식을 갖는 기독교사들"이 적다는 생각에 외로움을 느낍니다. 사실은 외롭지 않은데, 늘 따듯이 격려해주고 함께 기도하는 분들이 있는데, 제 속에 찾아오는 이 고독감, 절망감, 그리고 분노라는 어색한 감정이 저를 혼란스럽게 합니다. 투명하게 마음을 터놓고 함께 고민하며, 온 밤을 새우며 함께 걱정하는 사람들이 적은 것처럼 느껴지고, 마치 운동은 저와 몇 사람이 알아서 하는 것처럼 되고, 우리가 함께 붙들고 씨름할 실천과 사역이 남의 일로 느껴지는 것 같은 거리감... 기독교사운동의 미래에 찾아올 힘겨운 싸움을 이겨낼 영적 자산의 빈약함을 생각하며 자주 걱정하고 있습니다.

선생님. 기독교사운동을 위해 그리고 쇠약해진 저를 위해서 기도해 주십시오. 그게 아니라고, 그것은 당신이 믿음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고, 내가 얼마나 기독교사운동을 위해 기도하는지, 당신의 부족한 믿음으로 하나님의 역사를 제한하지 말라고 저를 꾸짖어 주십시오. 갈 길이 먼데 여기서 약해지면 안된다고,  함께 기도하자고, 언제 우리가 우리 힘을 믿고 일해왔냐고 그렇게 말하며, 이제 선생님이 이 운동의 주인의 자리에 서서, 앞서서 일한다 생각하는 이들의 부족함을 메꾸어 주십시오. 선생님. 사랑합니다. 또 다시 연락 드리겠습니다.

             2005. 3. 8. 좋은교사운동 상임총무 송인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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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날 내가 친하게 지내는 선생님과 밤길을 오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우리 운동의 미래에 대한 번민과 생각이 많아지는 요즘, 그분은 나에게 "선생님, 우리가 이 운동이 언제까지 갈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제가 하는 일도 지금 엄청 잘 되지만, 그러나 무너질 때도 있고 그래서 저는 퇴로도 생각해야한다고 봅니다."

그의 이야기는 옳은 이야기였다. 특히 무엇인가 이것 아니면 안된다는 집착으로 생의 과제를 붙잡으며 불면의 시간을 보내는 인생들에게는 특히 그렇다.

하지만 동시에 그의 이야기는 그릇되다. 그의 이야기는 자신이 목숨처럼 생각하며 그것에 자기 인생 전체를 쏟아붙는 그 아픔의 시간, 땀흘리는 수고의 시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생의 과제를 온 존재를 다해 부둥켜 안는 격정의 세월을 면제해주는 이야기로 이해할 때는 그릇된 말이다. 그 이야기가 적용될 마땅한 대상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과제를 끌어안고 생의 밑바닥까지 내려간 사람이다. 고난과 고민, 자신의 생에 맡겨진 과제를 가지고 씨름을 멈추지 않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의 말씀이다.

성경에서 그리스도는 지금 고통받느나 기쁨이 찾아올 것을 말씀하셨다. 지금 잉태할 여인이 고통을 겪지만 출산한 아이로 인해 기쁨이 찾아올 것을 말씀하시며, 제자들의 고통이 기쁨이 될 날을 말씀하셨다.

잉태한 아이가 있는 여인만이 고통을 겪는다. 사랑할 사람이 있는 사람만이 그 사랑을 지키기 위해 온 밤을 지새운다. 사랑하는 아들이 있는 자만이, 그 아이들의 병으로 인해 울며 괴로와하며, 하늘을 향해 무릎을 꿇는다. 마찬가지로 이룰 꿈이 있는 사람만이 그 꿈 때문에 아파한다. 꿈이 없는 인생은 아파할 이유가 없고 절망할 이유가 없고, 온 밤을 지새오며 기도할 이유도 없고, 그것을 얻기 위해 생을 드리겠다는 위험한 선언을 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우리의 힘으로 인생의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고, 나 아니면 안된다는 집착 때문에 마음 속에 찾아오는 불면과 고통은 경계해야하지만, 꿈이 있는 인생에게 '고난과 고통', 그리고 '가시처럼 자신에게 파고드는 생의 괴로움'은 피할 도리가 없는 것이다.

이땅에서 편안하게 살며 비난받지 않고 오해 받지 않고, 배반당하지 않고 살고자 하는 인생은 그렇게 살라. 그에게는  대가를 치루며 얻어야할 꿈이 없는 인생이다. 나는 그렇게 살지 않으련다.

얻어야할 것, 꿈 속에서, 오랜 내 젊음의 그 뒤안길에서, 내 생의 밑바닥에서 꿈으로 찾아오신 그분이 내게 주신 그 귀한 것을 붙들고 살아온 십수년의 시간, 아파하고 괴로와하고 여러날 허비한 불면의 시간을 나는 후회하지 않는다. 가시처럼 내게 찍혀온 아픔이 그꿈을 얻는 댓가라면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그토록 꿈꾸던 세상이 오지 않을 때 그것을 어쩔 수없는 일이라 선선히 응락하며 털고 일어날 자신이 없다. 어떻게 꿈꾸던 것인데, 내 미래와 내 가족과 생의 모든 것을 던져서 얻고자 한 것인데, 그것이 정말 가치있다고 생각했다면, 그것을 얻는 것이 내게 진정 진실이었다면, 나는 그러마, 그렇게 하시라고 말씀드리지 않으리라. 외치리라. 당신이 준다고 하지 않았냐고... 당신이 생을 걸라고 하지 않았냐고... 내 실수와 잘못과 연약함을 당신은 모르고 나를 선택했냐고... 여기서 끝내서는 안된다고 부르짖으며 달라고 요구하겠다...

그러나 그 모든 부르짖음의 끝자락에서, 새벽처럼 찾아오는 음성, 내 사랑하는 분, 내 영광이요 자랑이신 그분이 찾아오셔서, 내 어깨에 매인 짐을 가볍게 하시며, "이젠 됐다", 그렇게 말씀하신다면, 그제서야, 이 모든 집착과 모든 괴로움과 모든 꿈을 접고, 나는 새로운 길을 떠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2005.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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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평가 때문에 한참 어려운 시기를 보내던 때에 택시안에서 메모한 글이다.
나는 그 시절을 가끔 회상할 때마다, 그 시절의 고통과 아픔과 절망이 떠올라,
몸서리가 쳐진다. 조직을 잃는 듯한 위기, 그속에서 도저히, 도저히 교원평가를 찬성하겠다는 말을,
가장 정치적으로 예민한 상황에서 발표해야하는 그 상황을 나는 견딜 수 없었다.
그러나 내게 뜻이 어느날 폭포수처럼 찾아오고, 가야할 길이 명징해진 그때,
십자가에 죽으신 주님의 마음이 이해되고, 나도 그렇게 이 시대 고통받는 사람들을 위해
내 인생을 내어주는 십자가의 길을 가야함을 인정하고, 그렇게 살기로 결심하며,
사람들 앞에 서야하는 그 고통을 나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제 이 조직을 떠나겠다고, 실망했다는 그런 회원들의 정당한 비판,
그러나 도무지 그들의 비판에 마음을 접기에는 더 큰 세상, 더 큰 가치가 보이고,
교원들에게 참으로 유익한 또 다른 길이 보이기에, 그냥 모든 것을 가슴에 끌어안고,
침묵으로 견뎌야했던 그 시절의 아픔을 나는, 잊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내 인생에서 가장 보람된 시간을, 그 시절로 생각한다.
그 시절의 아픔은 내 인생의 훈장이요, 그 시절의 고통은, 주를 더 깊게 이해했던,
그래서 말씀으로 위로함을 받았던 생명의 시기라는 것을, 내가 알기에,
고통이었지만 잃고 싶지 않았던 시절이었다.

새로운 길을 가는 지금, 나는 어떻게 다시 내 인생을 살아야할 것인가?
어떻게 그렇게 자신을 죽이는 그 결정을 다시 오늘의 과제로 끌어안고,
수십배 어려운 길을 갈 것인가, 생각하면, 마음이 무겁다.

그 모든 것을 넘어가기 위해 내게 필요한 것은, 그 고통보다 더 큰 가치,
변화될 세상의 미래에 대한 확신이겠지만, 그 미래가 내 생애에 오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받은 증거가 있으니, 내가 추하고, 내가 죄인이고, 내가 매일 휘청거리며 살더라도,
그 증거만 붙들고 모든 것을 견디고 모든 것을 바라며, 내 길을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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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로운 일이다  

급한 일 때문에 고향으로 내려가는 길에 버스를 잘못 타,
결국 고향 가는 길, 엉뚱한 곳에 내려 8만원이나 내고
택시를 탔습니다. 가던 중 택시 안에서 심란한 생각을 몇자
적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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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원평가제도. 이 싸움은 적어도 우리 좋은교사운동 편에서
는 패배가 예정된 싸움이다. 성공해서 도입되어도 패배요,
도입에 실패해도 패배인 이 희한한 싸움.
조직의 이익에는 도무지 아무런 도움이 안되는
패배가 예견된 싸움의 길로 우리는 왜 나섰는가?

내 핸드폰에 문자 항의가 날라오고, 깊은 생각 속에서 사려
깊은 충고를 해주시는 분들의 말씀에 섬뜩 "길을 잘못 왔나"
두려움이 생겨, 돌아보며 왔던 길 틀림은 없었는지 헤아려보
는 세월의 고비를 여러번 겪었다.

대국민 선언을 하기 전, 새벽에 주신 말씀, 교사와 국민들이
하나가 되고 화해하기 위해 우리가 이 부담스런 십자가를 져
야한다는 말씀...

100분 토론 당일 날, 이 부담스러운 짐을 인해 너무 힘겨웠
을 때, 내가 너희 하나님이라는 그 말씀으로 나를 위로하시
던, 큐티 끝나고 기도 끝내고 일어설 때, 그 새벽으로 미국에
서 전화를 걸어, 하나님이 꼭 선생님께 전화하라고 했다고
하면서, "강하고 담대하라"고, "내가 너와 함께 하겠다"고
하시며 우시던 그 선생님...

공청회 무산시킨 날,
학부모들의 안타까운 호소에 내 양심이 흔들려, 이제 그나
마 갖고 있던 구실도 내려놓고 조건 없이 수락하기로 했던
그날의 아픔...

문제를 풀겠다고 이리 뛰고 저리 뛰다 늦은 밤, 산란한 마음
으로 시청 앞 거리를 지나 집으로 오며 흘리던 눈물...

그러나 지금, 마음 속으로, 좋은 이야기든 싫은 이야기든, 이
제 그만, 우리가 할 일은 다 했으니, 더 요구하지 말라고, 정
말 우리는 지금까지도 죽을 고비 넘기며, 어쩌면 이것으로
우리는 다 죽은 것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이제 얼마 안 남
은 힘으로 또 다른 미래를 준비해야하는 것 아니냐고, 그런
마음으로 이제는 나서고 싶지 않고, 개입도 하고
싶지 않다고... 약한 마음이 슬며시 자리를 잡는다.

홈페이지에 교사들이, 회원들이 분노와 섭섭함을 토로할 때
마다, 더 많은 분들의 소리 없이 조용히 물러가며 마음 속 지
지를 거두었을 교사들, 회원들의 돌아선 마음, 그 무서운 침
묵과 그로 인한 고독이 찾아올 때마다, 그동안 쌓아두었던
신뢰의 자산을 다 까먹은 듯한 느낌이 스산하게 찾아온다.  

어디까지 가야할까? 이렇게 다 까먹고 우리가 그래도 가야
할 길이 어디며, 얼마만큼 더 갈 수 있는가?

'교원평가제도'. 이것이 우리 운동의 끝이라면 여기서 장렬
히 전사하고, 우리의 모임을 그만 두면 된다. 그러나 이것 때
문에 우리가 모였던가. 숫한 그 험한 고비를 이것 때문에, 여
기서 죽으려고 넘어 왔던가. 그것이 아니고, 우리는 가야할
길의 한 모퉁이를 겨우 직면한 것이고, 갈길은 아직 멀다면,
여기서 겪는 이 힘겨움은 어찌할 것인가? 전체가 아닌 부분
인데, 여기서 모든 에너지를 다 소모하고, 우리는 어찌할 것
인가?

약속의 땅을 기업으로 주신 주님... 10만 기독교사들을 품는
비전을 꿈꾸었는데, 전체 기독교사들을 품고자 애썼는데, 여
기서 "게토"처럼 소수의 무리로 남는 선택으로 몰려가는 이
흐름은 무엇인가?

실패와 패배의 쓴 잔을 각오하고 마셔버린 지금. 마치 다시
무엇을 되돌이킬 무엇이라도 있는 것처럼, 다시 시작하면
잘 할 어떤 아쉬움이라도 남은 것처럼, 무엇인가를 붙들려
는 이 원초적 두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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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교직사회가 우리 때문에 아이들과 국민들에게
신뢰를 얻을 수 있다면,
아니 그렇지 않더라도, 더이상 교사들의 잘못과 실수로 인
해 이땅의 아이들과 부모들의 마음에 상처가 생기지 않고,
잘못된 평가로부터 고통받는 교사들을 지켜내고,
교사의 새로운 권위를 키워낼 수만 있다면,

이것을 계기로 오랜 동안 교사들을 힘겹게 만들었던,
그 자존감과 교사의 존엄성을 짖누르던 낡은 제도를 혁파할
수만 있다면, 그래서 모두를 승리자로 만들 수 있다면,
우리의 "패배"는 잘된 일이다.

이 패배의 쓴 잔을 마심으로 모두가 누릴 "성공"의 전리품,
그중 우리가 취할 몫을 생각한다.

그러나 황망하게도,
우리가 이땅에서 누리며 취할 몫은 없고,
너희는 여기서 머물러서는 안된다고,
또 다시 나를 따르라 말씀하시는 주님의 그 말씀에,
또 다시 자리를 털고 일어나, 얄량하게 거죽밖에 남지 않은
이 육신을 던져, 다시 소모하는 일, 소진하는 일,
죽는 길을 선택하는 삶은 외로운 일이다.

신고

저는 시를 쓰는 삶과는 먼 세월을 보냈습니다. 사실 고등학교 때 시써서 상을 받았지만, 그때는 정말 시다운 시를 쓸 사람이 우리 학급내에 거의 전무했고, 그냥 유민숙이라는 국어 선생님, 그분이 저를 귀엽게 봐주셔서, '차하'라는 이름도 생소한 상을 주신 기억만 있습니다. 그리고 대학원 다닐 때, 가끔씩 그러다가 선생으로 아이들을 만나서 살아가면서 문득 나를 스치고 가는 어떤 상념이 있을 때 메모식으로 쓰는 시가 고작이었습니다. 그러다가 본격적으로 시를 쓰게 된 것은, 사실 우리 '좋은교사'라는 잡지의 캠페인을 읽힐 글로 만들어야하겠다는 마음으로, 시라는 형태를 빌려야겠다 결심하기 시작해서부터였던 것 같습니다. 아래 시도 그런 차원에서 씌여졌습니다.


아래 시... 시라기 보다는 사실 저의 마음의 표현입니다. 지난 13년 교사운동을 위해 한걸음으로 달려오면서, 숱한 고비를 넘겼지만, 돌아보면 기도의 능력이었습니다. 아이들과 씨름할 때 도무지 내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벽을 만날 때, 내 속에 더이상 아이들을 사랑할 뜨거움이 사라졌을 때, 무릎을 꿇고 당신의 마음을 부어달라고 기도하고, 또 아이들을 품을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고, 이 시대를 향한 주님의 마음을 품을 수 없는 이 식어버린 마음을 돌아볼 때마다 괴롭던 그 시절... 기도의 힘으로 그 길고 험한 세월을 건너왔습니다.


지금... 지금은 아침의 기도를 합니다. 그러나 정든 교회를 이제 떠나, 올해부터는 그때 무릎을 꿇었던 그 정든 제 젊은 시절의 교회 예배당을 다시 갈 수 없는 지금, 아침마다 일어나 아이들 공부방으로 들어가서 기도합니다. 조용한 공간에서 기도가 더 잘될 것 같은데도, 이제는 졸음과 싸워야하고, 말씀의 깊은 깨달음을 얻을 수 없고, 그 한 말씀 때문에 기도가운데 큰 힘을 얻던 그런 통찰력과 에너지를 경험하기가 매우 더딘 하루 하루 입니다.


일은 되어가지만, 마음 한켠으로 나를 에워싸는 수많은 벽들, 나도 어찌할 수 없는 가정적인 문제들, 사랑하는 사람들의 아픔과 단절감, 일을 하다가 부딪히는 만남의 아픔... 그런 것으로 밤잠을 자지 못하며 깨이는 그런 세월 속에서, 내 젊은 시절 학교 교정에서 출근하지 않고 만나던 내 주님, 교정을 돌면서 묵상하다가 내 속에 찾아오는 소리없는 깨달음에 행복하던 그 시절의 감격이 이젠 발버둥쳐야 겨우 주어지는 이 단절감은 참으로 괴롭습니다...


무슨 일을 하든, 그 첫마음이 식어져 버린다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겸손함을 상실하고, 무엇이라도 된 것과 같이 더이상 남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기 속의 신념을 따라 움직이는 그런 교만이, 저의 내면 속에도 찾아올까 그것이 너무도 두렵습니다. 무엇인지 몰라서 늘 과제 앞에 두려워하며 자신의 연약함을 인해 힘겨워하며 무릎을 꿇는 그 마음이 사실 희망이고 가능성이라는 것을, 늘 잊지 않았으면 하고 바랍니다...



위험한 일

생애 전체를 던져도 아깝지 않은
빛나는 사명이 내게 임함으로 인한 감격을,
알량한 경험과 값싼 기법으로 바꾸는 일.

아이들을 향한 뜨거운 사랑을,
가르침에 대한 풍부한 경력으로
대신하려는 어리석음.

새벽에 몸의 관성을 뿌리치고 일어나 무릎을 꿇고,
아이들 한 사람 한 사람을 기억하고 울며
세상을 고쳐달라고 기도할 때의
그 안타까움과 절박함의 세월을,
공허한 경륜과 경험으로 맞바꾸는 일.

울며 씨를 뿌리는 사람들의 발버둥침을 보아도
감흥이 없고,
가난한 세월의 누추함을 돌보지 않은 채
아직도 오직 그 사명만 붙들고 힘겹게 살아가는 사람이
오늘따라 불편하게 느껴지는 마음.

그러므로, 세월이 갈 때 경계할 일은
능력과 경험의 없음이나,
자금(資金)과 돕는 사람의 없음이나,
영향력의 왜소함이 아니라,

울어야할 것에 대한 눈물의 메마름과
아파할 것에 대한 상심한 마음의 결여와
새벽을 깨우기에는 너무
식어져 버린 변심한 마음, 마음이다.

2005.10.

신고

1월 22일 한통의 편지를 대표자들에게 보냈다. 퇴직에 대한 제안을 하고 나서, 그후 한달의 과정은 가정적으로나, 우리 운동 내부적으로나 격동의 시간이었다. 퇴직을 한다는 것은 의지하던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절대적인 시간을 필요로 했다. 교직의 지위가 상종가를 치는 그 시기에 아무리 공동체적 결정을 하는 것으로 퇴직을 이해해도, 새 삶의 소중한 일부를 내려놓는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웠다. 대표자 모임을 끝낸 후, 내부적으로 나와 정병오 선생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무엇인가를 보장해 달라는 내 이야기가 곁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참 당황스럽게 만들었고, 나를 가장 잘 아는 정병오 선생님에게 이루 말할 수 없는 근심을 안겼다. 서운함과 실망감, 두려움의 감정이 복잡하게 엉켜져 우리를 힘겹게 하던 시절, 결국 기윤실 교사모임 수련회  마지막날 내게 찾아온 말씀을 붙들기로 결심한 후, 모든 것이 풀려져 나갔다. 생일날 내 아내가 보내온 편지... 결사적으로 막는 대신 내 앞길을 축복하며 신뢰하며 그 길에 자신의 인생도 함께 하겠다는 아내의 글로 나는 이 길이 주께서 허락하시는 길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며, 기쁜 마음으로 무엇인가를 공동체에 조건으로 요구하지 않고, 5년 이후 내 모든 일을 접고 새로운 길을 떠나기로 했다... 그때 그분들께 보낸 편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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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행위원 여러분들께


지난 번 저의 퇴직과 관련하여 저희 가족들의 반응 및 그와 관련된 저의 생각 등을 정리한 문건을 보내드린 지 한 달이 되어 갑니다. 그 시간이 저에게는 참으로 길고 긴 시간으로 느껴졌습니다. 그 문제와 관련하여 참 많이 고민하고, 주변 선생님들과 의논도 하고, 수련회와 성경묵상과 기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인도를 받으려고 노력해왔습니다. 덕분에 사무실 일이 한동안 좀 어려워지기도 했지만...


한달 전, 가족들의 우려를 생각하면서 제가 여러분께 평생 직장 개념의 진로를 보장해달라고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보수 문제도 꺼냈지만, 그 동안 기도하며 주의 뜻을 헤아려 보니, 그 모든 것이 참 부질없는 일이었다는 생각이 깊어졌습니다. 지난 기윤실 수련회를 통해서는 마음 속에 있었던 인간적인 과욕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가장 많이 우려했던 점, 그러니까 저의 퇴직으로 함께 일하던 분들에게 혹시나 낙심을 주지 않을까 하는 부분도 그렇지 않다는 확신도 얻게 되었습니다. 3주 연속으로 저희 교회에서 목사님이 전하신 설교를 통해서 두려움을 내려놓고 퇴직해야하겠다는 강한 확신과 흥분이 생기기도 했습니다. 무엇보다도 기쁜 것은 저의 아내가 제게 생일날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내, 저의 결정에 강하고 따스한 지지를 보냈다는 사실일 것입니다.


“가슴 속에 늘 뜨거운 불덩이 하나 있어, 시간의 장벽도 공간의 장벽도 훌쩍 뛰어넘는 걸 여러 번 봤습니다. 때로 나와 같지 않아 어색해 하기도 하고, 화도 내보기도 하지만, 나와 같지 않아 존경할 수 있는 당신. 힘들고 어려운 시간을 보내는 걸 옆에서 지켜볼 수밖에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어떤 결정을 해도 당신의 결정은 현명하고 올바른 결정이 될 것임을 믿고 있고, 나도 그 결정과 함께 할 겁니다. 시간이 갈수록 당신의 소중한 꿈이 어떤 모양으로든 어떤 색깔로든 더욱 아름답게 피어나길 기도하고 싶습니다.-신을진


참 힘들고 어려웠던 결혼생활이었는데, 이렇게 전폭적인 지지를 해준 아내가 너무도 감사했습니다. 며칠 전 마지막, 어머니와의 대화를 남겨두고, 제가 아침에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주님, 평생 가난과 질병과 상처로 한이 많으신 어머니에게 제 퇴직 문제가 또 하나의 상처가 되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적어도 섭섭하지 않은 마음으로 저의 길을 허락하도록 도와주십시오.” 그리고 그 날 아침 어머니는 선선히 저의 길을 허락하셨습니다. 대화하며 어머니의 평안한 웃음을 보았습니다.

또한 여러분들이 저의 퇴직을 결정했어도, 그 결정은 하나님이 하신 것이기 때문에, 제가 여러분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을 의지해야하겠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지나고 보니, 지난 한 달의 과정이 무익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저에게 확실하지 않았던 부분들, 불안으로 시작했을 새로운 길을 그 많은 과정을 통해서 담대하게 갈 수 있도록, 주께서 상황으로 말씀으로 길을 열어주시고 제 마음을 다져 주신 것을 생각할 때, 이 모든 방황과 낭비의 시간이 보석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러고 보니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상황은 변하지 않았으나, 마음은 많이 달라졌네요. 설혹 실패하는 길일지라도,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길이기에 믿음으로 갈 수 있고, 또 사랑하는 선생님들이 계시기에 두려움이 없습니다.


그래서 다시 제안합니다. 새로운 것은 없습니다. 처음 실행위원 모임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5년 동안 일하겠습니다. 그리고 5년 후에 저의 사역에 대한 평가를 받아서 앞으로의 진로를 결정하도록 모든 부분을 위임하겠습니다. 저의 진로나 경제나 임기나 모든 부분은 여러분들의 결정에 따르겠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5년 후에는 상임총무로서의 역할만큼은 접겠습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상임총무의 역할을 의미할 다른 역할(예컨대 제가 제안했던 사무처장 등)도 맡지 않겠습니다. 그렇게 되면 운동은 발전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 퇴직한 것이 아닌 이상, 저는 운동 현안 뿐 아니라 사람을 기르고 세우는 일에도 부지런히 관심을 갖겠습니다. 5년 후, 새로운 젊은 운동가가 저의 다음을 이어 받아 기독교사운동을 섬기도록 길을 비켜서겠습니다. 그 이후 진로가 지금 보이지 않을지라도, 제 아내가 충고한 것과 같이, 한 모퉁이를 돌아서야 다음 길 모퉁이가 보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난 10여 년의 삶을 돌아볼 때, 형편없는 인생이 이렇게 주의 일에 귀한 쓰임을 받고 선생님들로부터 분에 넘치는 관심과 사랑을 받았음이 저의 행복이고 영광이라고 생각합니다. 저의 방황과 뜻하지 않은 사려 깊지 않은 행동에도 불구하고 기도와 관심을 가지고 기다려 주신 여러분. 고맙습니다.


                            2003. 1.22. 주안의 한 지체 송인수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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