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은 묻는다.“이것 배워서 어디다 써먹는 거야?” “도대체 이걸 왜 하는 거지?” 그들이 ‘이것’이라고 말하는 ‘그것’은 다름 아닌 수학이다. 그들에게 수학은 재미도 없고 쉽지도 않다. 그런데 “수학은 감동을 주는 학문”이라고 ‘주장’하는 최영기 교수의 제 1성은 누군가의 말처럼 ‘문화적 충격’ 그 자체였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수학자의 모습을 한 철학자? 철학자의 탈을 쓴 수학자? 그의 정체는 물론이고, 수학과 철학의 경계 역시 모호했다.

수학 성적은 잘 나오지만 수학이 전혀 즐겁지 않은 우리 아이들

TIMSS와 PISA의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는 최상위권이다. 하지만 선호도나 자신감 등에 있어서는 최하위를 면하지 못하고 있다. 최 교수는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알고리즘’(algorithm)으로 진단한다. ‘알고리즘’은 수학 영역에 있어서 ‘문제를 푸는 자동화된 사고(思考)’를 뜻한다. 말하자면, 비슷한 유형의 문제들을 많이, 반복적으로 연습할 때 체득되는 일종의 ‘관성’이라고나 할까? 이는 얼핏 보기에 상당히 유익한 기술 같지만 실은 치명적인 약점을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시험 보는 것 말고는 거의 ‘써 먹을 데가 없다’는 것이다. ‘알고리즘’이 문제에 대한 진지한 사고 과정을 거치지 않은, 단순한 문제풀이 기술에 불과하다는 것을, 그래서 결국 ‘쓸모없는 지식’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아이들도 모르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방식이 여전히 통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이른 바 후진 그룹이 선진 그룹을 따라잡는 ‘속도전’에서 놀라운 효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기까지! 그 이상은 ‘속도’가 아닌 ‘방향’과 ‘철학’이 좌우한다. 철학이 없고 방향 감각을 상실한 우리의 수학 현실은 아래와 같은 학생들을 낳았다.

“우리 학생들을 보면 (수학을) 무지 열심히 하는데 앞으로 결코 (수학을) 쓰지 않겠다고 결심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최 교수의 심정이 느껴진다. 그건 필시 ‘(수학을)하기 싫어도 아니 할 수 없는’ 우리 아이들에 대한 안타까움과 수학이라는 학문에 대해 그가 가진 애정이리라. 국내 흥행에 실패한 어느 영화의 제목처럼 그는 ‘수식을 사랑’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출신대학보다 중요한 것

이어 최 교수가 제시한 자료는 흥미로웠다. 아웃라이어(outlier)에서 가져왔다는 터마이트(Termites)의 목록들에는 널리 알려진 명문 대학에서부터 심지어 인터넷 검색으로도 찾기 힘든 이름 없는 칼리지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학교의 이름들이 수록되어 있었다. 그것은 노벨의학상과 노벨화학상을 수상한 학자들을 배출한 북미 대륙의 학교들이었다.

최 교수의 의도를 간파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출신 대학으로 사람을 평가하는 우리 사회의 뒤틀린 행태와 거기서 비롯되는 엄청난 교육적 낭비를 지적하려는 것이다. 수학자인 그가 철학을 그토록 강조하는 이유를 조금은 알겠다. 마르크스는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고 했다지만, 의식의 변화 또한 존재의 변화를 이끄는 법이기에.


4명의 노벨상 수상자들과의 인터뷰 또한 인상적이었다. 2001년 노벨물리학상을 받은 칼 위만(Carl E. Wieman) 콜로라도대학 교수, 1997년 노벨물리학상의 주인공 스티븐 추(Steven Chu) 현 미국 에너지 장관, 1998년 노벨생리의학상 공동수상자인 루이스 이그내로(Louis J. Ignarro) UCLA 의대 교수, 2006년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조지 스무트(George F. Smoot) UC버클리 대학 교수가 그 주인공들인데, 이들은 마치 사전에 공모라도 한 것처럼 하나 같이 ‘꿈’과 ‘열정’, ‘끈기’를 강조한다. 그 밖에 ‘비판적 사고능력을 갖추기 위해 많은 책을 읽으라’, ‘개인적 이익을 뛰어 넘어 사회적 가치를 추구하라’, ‘실패와 좌절을 두려워하지 말고 부둥켜안고 가라’는 등 우리가 익히 알고는 있지만 실제로 잘 지키지 못하는 내용들이다.

비전이 이끄는 삶

짧은 동영상도 하나 보았다. 언젠가 리드 대학의 졸업식에서 스티브 잡스가 한 축사다. 세상의 거의 모든 영웅 이야기가 그렇듯 그 역시 숱한 실패와 좌절의 나락에 빠졌지만,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일’을 찾고 그 일에 투신함으로써 이 시대 최고의 성공의 아이콘으로 떠올랐다. 그의 연설은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이미 여러 번 본 것인데도 볼 때마다 ‘새로운’ 감동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이 ‘새로움’이 한편으로는 내 기억력의 급속한 감퇴를 의미하겠기에 유쾌하다고만 볼 수는 없다.

최 교수는 스티브 잡스의 맞수라 할 빌 게이츠 이야기도 빼놓지 않았다. 빌 게이츠가 자신의 모교인 하버드 대학에서 “자기만 아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며 세계를 변화시키는 가치 있는 삶을 주문했다고는 것이다. 최 교수에 따르면 이들의 삶이 말해주는 것은 사회를 움직이는 ‘비전’이다. 하지만 오늘날 입시를 향해 치닫고 있는 우리 사회는 ‘비전이 없는 제로섬 게임’을 하고 있으며, 그 결과는 삶 자체를 소진시키는 비극으로 나타난다.

Sternberg 라는 심리학자의 ‘창의성’ 이론과 창의성을 위해 계발해야 할 10가지 요소도 잠깐 소개되었다. 비전을 강화하고 구체화시키는 능력이 창의성에서 나온다고 보았기 때문이리라. 창의성에는 어떠한 요소에 투자할지 결정하고 실행하는 능력이 매우 중요하다. 이는 불필요한 낭비를 줄이는 길이기도 하다. 10가지 요소 가운데 최 교수는 유독 9번째 요소인 ‘애매함에 대한 내성’을 강조하는 것 같았다. 확실한 답이 나오지 않는 상황을 견디는 인내 또는 끈기가 중요하다는 얘기를 하려는 것이었을까?

시계를 보았더니 벌써 한 시간이 되어 간다. ‘수학 얘기는 언제 하시려나?’ 걱정 아닌 걱정을 하고 있으니 드디어 수학 얘기가 나온다. 그는 일본의 유상수학자의 ‘수학 및 과학을 대하는 마음가짐’ 6가지를 간단히 설명했다. ① 호기심 및 동기, ② 지식, ③ 파고들기, ④ 낙관성, ⑤ 합리성, ⑥ 심미성.. 그는 이것이 수학과 과학을 대하는 마음가짐이라고 했지만 오히려 철학을 위시한 인문학을 할 때 취할 태도일 것 같다. 하지만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최 교수의 말처럼 ‘수학이 철학’이라면.

감동을 준 수학자 피타고라스

기원전 300년 경 피타고라스는 수학을 통하여 감동을 주었고, 그의 제자들은 목숨을 걸고 수학을 공부했단다. 그들을 지칭하여 ‘피타고라스학파’라 한다. 하지만 그들이 정치적 이유로 박해를 받아 죽고, 기원전 200년 경 유클리드가 피타고라스학파의 연구 업적 중 일부를 복원하여 책으로 묶었는데, 그는 책의 제목을 “Elements”라고 붙였다. 뜻은 ‘원소’, 즉 ‘수학이 모든 것의 근본’이라는 뜻이 되겠다.

강의는 수학과 철학의 경계를 종횡무진 넘나들며 진행되었다. 소피스트, 소크라테스, 플라톤.. 진리의 세계인 이데아의 표상인 수학, 인간의 영혼을 함양시키는 수학은 위대하다.. 그리스 철학사를 수강하는 듯 했다. 최 교수는 2300년 전에 구축된 수학이 아직까지 거의 변함없이 가르쳐지고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감동받을 사유가 된다고 말한다. “영원하며 결코 변하지 않는 사물의 본질인 ‘이데아’를 공부하는 학문이 ‘수학’이니 수학을 공부하면서 어떻게 감동받지 않겠어요?” “미국의 월가를 움직이는 것도 수학입니다.”

하지만 우리 아이들 중 수학에 감동받는 아이들이 얼마나 있을까? 세계에서 가장 열심히, 그리고 많이 수학을 공부하면서도 감동을 받지 못하는 것은 어느 새 몸에 배인 ‘알고리즘’탓도 있지만 현실과 동떨어진 조작된 데이터, 가상의 데이터를 사용하여 문제를 만들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니 ‘배워서 어디다 써먹느냐’고 물을 수밖에 없다. 실제로 그가 보여준 미국의 고등학교 수학 문제들은 실제적 데이터에 기반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 수학은 고스란히 현실이 된다.

수학은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과 눈에 보이는 현상을 이어주는 다리’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 가르쳐지는 수학은 본질도 다루지 못하고 현상도 비껴간다. 이것이 문제임을 모르지 않는다. 하지만 변화는 저절로 오지 않는다. 최 교수의 목소리에 힘이 들어간다. “새 술을 담을 새 부대가 필요합니다.”

박사가 사랑한 수식, 1-1=0

‘불’이 아니라 ‘0’이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발견은 ‘0’”이라고 말하는 수학자의 얼굴은 빛났다. 수학을 하면서 끝없이 놀라고 숫자 ‘0’에 무한감동 먹는 사람.. 그가 추천하는 영화 “박사가 사랑한 수식”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0’이 없는 세상을 상상할 수 있느냐고 그는 물었다? 물론 없다. 수학에서 거의 감동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에게 애초부터 무리한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0’의 발견이 산업혁명을 이끌었고, 복소수의 발견은 전자공학을, 4원소(?)의 발견은 양자역학을 가능케 했다는 정보에는 동의한다. 진정성과 호소력이 담긴 눈빛으로 수학의 감동을 전하는 최 교수의 열정 또한 감동적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오랫동안 수학 알기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으로 해왔고, 그래서 ‘난 잊을 테요~’라고 작심해야만 했던 아픈 경험들이 켜켜이 쌓였을 수많은 안티 수학인들에게 수학의 감동을 안겨주기에는 역부족이었다고 여겨진다.

그가 했던 말들을 곱씹어 본다. “수학의 발견은 위대하며, 수학의 핵심 내용이 담긴 초등학교 수학은 감동의 연속이(어야 한)다.” “어릴 적 감동은 ‘아하~’를 경험하는 순간이고, 이 ‘아하’의 깨달음이 비전으로 영근다.” 아.. 나에게 ‘믿음’이 부족한 건가? 잠시 웃었다. 감동 또한 억지로 되는 게 아닌 것을..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처럼 희미하지만..

강의를 마치기 전 최 교수가 내어 놓은 현재 우리나라 수학교육에 대한 해법은 다소 의외였다. 그는 영국의 작가 체스터튼의 한 줄 글로 결론을 대신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모든 것이 제 잘못입니다.” Mia culpa.. 내 탓이오.. 좀 생뚱맞다는 생각이 들지만 틀린 말은 아니다.

모든 문제는 다 연결되어 있고, 그것을 푸는 길이 바로 내 안에 있음을 우린 모르지 않는다. 해결을 위해 내가 발 벗고 나서지 않는 한 문제는 풀리지 않는다는 것도 안다. “모든 것이 내 잘못입니다” 라는 그의 ‘고백’은 바로 나의 변화를 촉구하고 있었다.  짧지 않은 인생, 근시안적 자세를 버리고 지금은 조금 부족해 보이더라도 아이가 비전을 품고 열정을 발휘할 수 있도록 믿어주고 기다려주면 아이는 분명 행복할 수 있을 거라고 그는 말했다.

수학 이야기를 기대했던 청중들에게 그는 철학으로 대답했다. 땅의 언어와 하늘의 언어의 소통이 어려운 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그것을 여기서 확인하게 될 줄이야.. 아마 내 눈이 어두웠던 탓일 게다. 현상계와 이데아 사이에 놓여 있다는 그 다리가 보이지 않았던 이유 말이다.

강의 자료집을 덮다가 다음 시간의 제목을 훑어보았다. 눈에 확 띄는 단어가 있다. ‘아하(A-ha)’ 체험!!! 한결 가벼워진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는 길. 처음 품었던 의문이 새삼 고개를 디밀었다. 수학과 철학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을 최영기 교수. 그를 수학자의 모습을 한 철학자라고 말하면 실례가 될까? 철학을 하는 수학자라고 부른다면?

 
 
 수원 영통에서 작고 건강한 교회를 일구는 목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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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문제를 보면 한글, 숫자, 영문 알파벳 기호가 써있다. 읽지 못하는 부분은 없다. 그렇지만 수학문제는 내게 외국어보다 어려운, 해독 불가능한 외계어나 다름없다. 그래서 수학은 더 이상 뒤도 돌아보고 싶지 않은 ‘잘못된 만남’으로 남았었다.

그런데…..세상 만물의 근원을 ‘수(數)’로 보았다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에 살았을지 모를 피타고라스 할아버지를 수학책과 철학책이 아닌 곳에서 만나게 되었다. 눈에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 놓여진 다리가 ‘수학’이라고 설파했단다. 수.학.을. 통.해. 영원하며 결코 변하지 않는 , 진정으로 존재하는 것들에 관해 숙고했단다. 2천 5백년 전의 수학의 본질은 이랬단다.

내게는 문화적 충격에 다름 아니다. 지독한 반전이다. 사십평생(부끄럽지만) 수학이 이런 학문이었다는 사실을 처음 들어봤다. 분명 초.중.고등학교를 졸업했고, 대학 교양과목에도 있었는데, 어쩜 이리도 파릇파릇 생소한 것일까. 수학에 있어선 내가 바로 ‘배운게 배운게 아닌 학생’이었고 ‘외형위주의 학습’을 한 전형이었다.

한국 학생들이 국제 수학 성취도는 상위인데 선호도는 이에 반비례해 현저히 낮은 이유가 실생활과 연계되지 않는 가상 데이타들로 그것도 개인의 편차나, 학습능력을 고려하지 않은 선행학습을 통해 무한 반복 문제풀이를 해대느라 수학을 재미없고 지겨운 과목으로 인식하게 되는 현실에 다시 한 번 가슴이 답답해졌다.

결국 대학, 상위권 대학이라는 곳에 입학하기 위해서 무한 경쟁에 내몰리는 아이들에게 ‘감동적인 수학’은 사치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그럼 대학을 안갈거면, 또는 상위권 대학이 목표가 아니라면 현 수학입시 패턴에 아이를 밀어넣지 않아도 된다는 선택이 보인다. 하지만 입시 수학만 포기하면 수학의 심미성을 맛 볼 기회가 있는 것일까? ‘어떻게’ 라는 의문의 답이 아직 찾아지지는 않았다. 교수님도 이와 유사한 질문에 실생활에 적용가능한 답변을 해주시지는 못했지만, 이런 문제를 고민하고 계시는 학자로서의 고뇌가 전달되어 안타까움을 공감했다. 새 술을 담을 새부대가 필요하다시니 결국 패러다임이 바뀌어야 한다는 어려운 문제에 이른다.

내 아이가 수학을 잘했으면 바라는 마음에서 감동있는 수학을 접할 기회를 주고 싶다는 바람으로 방향이 전환되었다. 매일 열 문제씩 꼬박 꼬박 풀게하기보다는 엄마가 불혹에 이르러서야 알게된 0의 위대함에 대해서 함께 얘기해 보고 싶어졌다. 영어,수학을 어떻게 잘하게 가르칠까를 궁리하기보다는 어떻게 살고싶은지 그러기위해 할 일이 무엇인지 살가운 대화를 나누고 싶어졌다. (아직 아홉살인데…)

어느 수학자의 고백처럼 ‘즐겁게 공부하다 인생에도 도통하게 되는’ 배움의 기쁨을 느낄 방법을 찾기위해 함께 노력하는 엄마가 되고 싶어졌다. 살아 있는 동안은 이렇게 무엇인가를 배워 나갈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에 감사한 마음이 든 강의였다, 내게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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