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학년이 시작된 지 한 달 반, 학교 안이나 학교 밖에서 만나는 선생님들마다 아이들과의 관계 문제로 비명을 지르고 싶다고 한다. 선생님들은 새 학년이 되면서 가졌던 기대와 희망을 좀 더 오래 가져가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아이들은 이미 일상으로 돌아가 선생님과 격전을 치를 준비를 해놓고 있다고도 했다.


간절한 소망이 없는 미래의 꿈


지각을 자주 하는 한 학생 때문에 몹시 힘들어하는 담임 선생님이 있어 그 아이를 내가 맡아 집중적으로 대화를 해주고 있는데, 며칠이 지나도 그 아이의 등교 시각은 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자꾸 만나 대화를 하다 보면 경험으로 알듯이 이 아이도 언젠가는 변할 것이다. 그 시기가 문제인데 그것이 한 달이 될지 두 달이 될지 모를 일이다. 때에 따라서는 고등학교에 가서야 달라지기도 하고, 사회인이 되고 나서야 깨우치기도 할 것이다.

가정 사정을 알고 보니 그도 딱했다. 사업에 실패한 아빠는 부부 싸움을 자주 하는데, 번번이 폭력적이란다. 그 폭력은 아이한테 가해지기도 하여, ‘우리가 싸우는 게 다 너 때문’이라면서 가정불화의 원인을 자식에게 돌리기도 한다고 한다. 하나 있는 언니와도 대화가 끊겼다고 했다. 아침마다 늦잠을 자는 동생을 깨우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둘 사이도 점점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의 성적도 좋을 리가 없었다.

그 아이에게 가정이란 무엇일까. 자신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날마다 살얼음이요, 미움이 감도는 집안을 ‘가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학교는 또 이 아이에게 어떤 공간일까. 날마다 지각했다고 교무실에 끌려와서 꾸지람을 들으면서 시작하는 하루는 그 아이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답답한 마음으로 자문을 다시 한다. 이 아이가 학교에 와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은 무엇이고, 이 아이에게 학교가 줄 수 있는 기쁨은 무엇인가. 장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했지만 그 소망엔 간절함이 묻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나마 그 아이에게 가장 기쁘고 위로가 되는 것은 친구들과 어울려 웃고 떠드는 일이다.

어느 교육학자가 쓴 글에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그때그때 가르쳐 주는 어른이 최소한 20명은 있어야 아이들이 변한다. 아이에 따라서는 마음의 그릇이 남보다 커서, 100명 이상의 애정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한다.”고 했다. 달라진다는 것,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이토록 지난(至難)한 일이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관심 있게 보다가도 문득문득 우울해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한 아이의 잘못된 습관을 고쳐주기 위해서는 이리도 많은 관심과 집중과 정성과 엄청난 인내심과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이니 말이다.

학교 현실을 모른 사람들은 한 학급의 아이들 수가 35명 정도로 크게 줄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 많은 선생님들은 학급당 65명, 70명 시절이 훨씬 그립다는 말을 자주 한다. 오늘의 많은 부모들이 옛날에 6, 7명의 자식을 키울 때가 오히려 더 쉬웠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지금 학교 현장에는 지속적인 대화와 관심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고,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공부 잘하고 모범적인 아이들까지도 학교에서 배울 것을 미리 학원에서 배우고 익히느라 지쳐 있기 때문에 그 눈빛을 살리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날마다 많은 선생님들은 이런 아이들과 부딪치면서 상처를 받고 있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날마다 이런 선생님들과 부대끼면서(?) 또한 상처를 받고 있다.


교육 현장 위기감 직시해야


우리의 교육 정책은 이 상처를 치료하는 것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구성원들 간의 건강한 관계의 회복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교육이 붕괴되고 있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멀쩡하고 교육만 무너진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지, 이명박 정부는 “지금까지 학생과 학부모들은 피나게 경쟁을 했는데 학교와 선생님들은 경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면서, 경쟁의 쌍칼을 휘두르라고 고삐를 죌 태세여서 교육 현장은 위기감조차 느끼고 있다.

치유, 그렇다. 이 지쳐 있는 학교현장을 향하여 경쟁을 강조하면 할수록 그것은 ‘폭력’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 상처투성이로 신음하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때다. 우리 교육은 지금 종합적인 치료가 필요한 중환자이다.


2008. 4. 14(월) / <시민사회신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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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북녘 사람들을 아주 가까이서 만난 것은 2005년 여름 금강산에서였다. 금강산에 도착해서도 자꾸 실감이 가지 않아 하늘과 산을 보고 또 봤다.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을 걸어 상팔담까지 가면서 서른 살이 좀 넘은 듯한 안내원과 짧은 대화를 했는데 그는 우리들의 질문에 당당하고 분명하게 대답하였다. 기독교와 신의 존재에 대해서는 아주 비판적이고도 부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음도 알게 되었다.


남과 북의 아주 특별한 관계


저녁에 식당에서 만난 여성 종업원들에게서 느낀 것도 역시 당당함과 자신감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상대방을 주시하였고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 눈빛들은 낯이 설면서도 신선한 매력을 느끼게 했다. 그 때 묻지 않은 눈빛은 남쪽이 가지지 못한 ‘순수한 힘’으로 다가왔다. 농담을 걸면 제법 여유를 가지고 받아들이기도 하여 뜻밖이었다. 밤에 이어진 공연은 가슴 뜨거웠다. ‘다시 만납시다’를 따라 부를 때는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시울이 뜨거워지기도 했다. 지금도 금강산, 그 북녘땅을 밟았던 기억이 꿈만 같다.

요즘 금강산의 감동이 어떤 불안감으로 바뀌고 있어 안타깝다. 인수위가 통일부를 없애겠다는 것을 시작으로, 새 정부가 들어서면서 통일부장관, 외교통상부장관, 합참의장 등의 발언들이 결과적으로 북을 계속 자극하였다. 북의 반응은 너무 날이 서서 ‘군사적 대응 조치를 취하겠다’는 표현까지 하면서 경고하는 사태까지 이르렀다. 직접 대화의 과정과 진의에 대한 확인 절차도 없이 이토록 조급하고도 과격한 반응을 하는 북쪽의 의도는 무엇일까. 새 정부에 대한 기대를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가 생긴다. 절망감을 느끼지 않고서야 어찌 국가 원수에게 대놓고 ‘역도(逆徒)’라는 극언까지 할 수 있는가.

더욱 답답한 것은 북측의 그런 반응에 대해 우리 측의 대응이 참 궁색하다는 것이다. 우리도 대놓고 김정일을 비난한다고 해도 우습고, 또 그리 한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니 말이다. 남쪽은 북을 무시하고 북쪽은 남을 극도로 증오해서 서로 얻을 것이 무엇인가.

새삼 현 정부의 대선 공약인 ‘비핵 · 개방 · 3000 구상’을 역지사지의 입장에서 한번 생각해 보게 된다. ‘비핵 · 개방’은 우리가 절실히 원하는 바이고, ‘국민 소득 3000달러’는 북측에서 절실한 항목일 것이다. 그러면서도 ‘3000달러’ 문제마저도 북으로서는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듯하다. 핵을 완전히 폐기하고 개방을 하면 1인당 소득 3000달러가 되도록 지원해 준다는 것이니, 북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을 건드린 것으로 생각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우리가 잘 살게 해 주겠다’는 표현으로 북측이 들었다면 자존심을 건드린 것으로 받아들일 가능성이 있다.  

북한이 적이라면 ‘특별’한 적이요, 하나가 되어야 할 적이다. 미움보다 안타까움이 먼저요, 증오보다 연민이 먼저다. 이성적인 논리만으로는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 남북 관계다.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퍼주기를 중단하라’고 말하지만 새 정부의 ‘국민 소득 3000달러’도 따지고 보면 퍼주기다. 퍼주기라고 비난해 왔던 새 정부마저도 이런 ‘퍼주기’ 정책을 내세운 것은 남과 북이 이렇게 특별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남북 관계는 그야말로 깊은 지혜와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한다. ‘실용’이라는 잣대를 어설프게 들이대면, 정작 ‘실용’과 아주 동떨어진 예기치 않은 결과가 올 수 있다는 것을 늘 생각하여야 한다. 우리가 북을 향하여 새로운 메시지를 전하고 싶다면 일방적으로 북을 향하여 던지는 식으로 해서는 일을 그르치기 쉽다. 직접 얼굴을 맞대고 대화를 통하여 밝히는 방법을 쓰되, 그 대화는 아주 길고 충분해야 한다. 우리가 전하고자 하는 간절한 뜻을 깊고 충분한 배경 속에 버무려서 전달해야 한다는 말이다.


통일의 싹은 밟지 말아야


지난 정부가 10년 동안 공들인 탑을 너무 쉽게 무너뜨리는 것 같아 참으로 답답하다. ‘퍼주기’라고 무수한 비난을 받으면서 이룩한 통일의 싹을 이렇게 쉽게 밟아버리고 마는 것 같아 참으로 안타깝다. 새 정부가, ‘우리의 본심은 그것이 아니다’라는 해명을 하고 있어 다행이지만, 얻는 것은 별로 없고 너무 많은 대가를 치르게 되지는 않을까 하는 염려가 앞서니 마음이 참 어둡다.

2008. 4. 7(월) / <시민사회신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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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 25일(화) 자 동아일보의 A14면을 보고 참으로 ‘동아’답다는 처량한 생각이 들었다.

- 학력 키운 중 교장 인사 우대
- 서울지역 영재교육원 합격자 분석해 보니·신용산초등학교 31명 최다
- 한국말 NO! 영어 몰입 수학 교육(사진과 설명)
- ‘떠들지 마라’ 유치원생 입 테이프로···
- 서울시 교육위원도 “의정비 올려받아야”

등의 기사로 채웠는데 놀라운 것은 그 기사 아래 전단으로 어느 사교육업자와 동아일보가 공동 주최하는 ‘특목고·자사고·국제중 입시 전략 설명회’ 광고가 주먹만한 글씨로 대문짝만하게 나 있었다. 그 ‘입시 전략 설명회’는 3월 30일부터 4월 3일까지 서울,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울산 등에서 이어진다고 했다.

아, 이렇게 얼굴이 두꺼워도 되는가. A14면은 이 광고를 더욱 빛내기 위한 기사들로 채운 것이요, 학부모들을 위협하는 기사들로 배치한 게 틀림없었다. ‘동아일보’는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신문이라는 걸 알고 있었지만, 참으로 한참 지나치다 싶었다.

특히 ‘서울지역 영재교육원 합격자 분석’ 기사는 합격자 수가 많은 21개의 초등학교를 1위부터 순위대로 소재하는 구의 이름과 함께, 공사립 구분 · 합격자 수 · 합격자 비율까지 아주 친절하게 낱낱이 밝혀 놓았다.

거대 언론이랍시고 한다는 짓이 이 수준이다. 중학교도 모자라 초등학교까지 줄을 세우고, 이제 유치원 아이들에게도 입시 준비를 시킬 생각인가 보다. 이런 기사 내용에 우리나라 학부모들이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를 뻔히 알면서, 학부모들의 욕망과 불안을 한껏 부추겨 놓았다. 사교육 장사를 잘하기 위해서는 학부모들이 충분히 불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학부모들의 두 눈을 경쟁으로 번득이게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사교육업자가 이런다면 그 나름의 생존 방식이라고 할 수 있겠는데, 이건 소위 메이저 신문이라는 게 이런 행태를 보여주니 기가 막힌다는 말이다. 어찌 신문사의 이름을 걸고 이렇게 사교육을 부추기는 일에 앞장설 수 있으며, 그 더러운 탐욕을 아무 거리낌 없이 드러낼 수 있단 말인가?

지난번에 실시한 중학교 1학년 일제고사 결과를 보고 서울시 교육청은 심각한 학력 격차를 해소한다면서,

· 방과후 학교 수업 강화
· 학력을 끌어올린 중학교 교장에 대한 인사 혜택
· 우수 교사 우선 배치

등 예산 및 장학 지원 사업을 마련할 계획이라고 했다.

공교육이 무너졌다고 하면서 학교에서 방과후 교육을 강조하는 것은 아이러니다. 무너진 학교 공간에다 아이들을 억지로 더 잡아놓겠다는 발상이니 앞뒤가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다. ‘방과전’ 교육을 어떻게 내실 있게 할 수 있는가를 고민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 일이 근본이고 먼저지 방과후 교육을 강조하는 것은, 소외 학생들에 대한 배려 차원으로는 바람직하지만 공교육의 신뢰를 되찾는 일과는 거의 무관하기 때문이다.

학력을 키운 교장에게 인사상의 혜택을 준다는 건 도대체 뭔가? ‘교육’을 잘한 교장이 아니라, 노골적으로 ‘성적’을 올린 교장이라니 이제 교장들이 할 일이 뭐겠는가? 학생들을 밤늦게까지 잡아놓거나 아니면 학교에서 경쟁적으로 좋은(?) 학원을 소개시켜 주어 더 많은 아이들을 사교육 시장으로 내몰기도 할 것이다.

거대 언론도 그렇지만, 요즘 공정택 서울시 교육감은 이명박 정권의 경쟁 교육을 가장 앞서서 외치고 실천하느라 신이 나 있다. 모르는 사람들은 믿어지지 않겠지만, 문득문득 학원 업자와 동업을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그가 내놓는 정책은 아이들의 건강권이나 인권에 대해서는 안중에 없고 철저히 경쟁으로 몰아가는 쪽이다. 교육감들이 유권자인 어른의 입장, 어른의 시각만으로 정책을 결정하다 보니 아이들은 더욱 소외되고 고통은 더더욱 커져만 가는 것이다.

좀 엉뚱하다 싶은 제언을 하고 싶다. 몇 년 전부터 시도 교육감을 지역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여 선거를 통해서 뽑고 있는데, 앞으로는 학생들에게도 선거권을 주자는 말이다. 부작용과 부정적인 측면을 먼저 생각하여 말도 안 된다고만 할 것이 아니다. 이것은 민주 시민 교육으로도 의미가 있고, 더욱 절실한 것은 그래야 학생들의 입장을 진정으로 생각하는 정책들이 그제야 쏟아져 나올 것이기 때문이다.

2008. 3. 31(월) / <시민사회신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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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김형근 선생님을 처음 만난 것은 2007년 1월 중순, 원주 상지대학교에서였다. 전교조 참교육실천대회에서 몇몇 선생님들과 함께 만났는데, 그의 첫인상은 투사라기보다 어떤 간절한 소망을 지닌 사람의 모습이었다. 그 진지함이 묻어나는 나직한 말씨는 다른 사람들이 귀를 기울이게 하는 힘을 지니고 있었다.


검찰은 자존심도 없나


그는 자신의 몸을 부수어 아이들 곁으로 다가가는 그런 선생님이었다. 가출한 아이들을 찾으려고 임실에서 전주까지 가고, 때로는 부산까지 갔다. 단돈 3천원에 자신의 자존심을 파는 것을 목격하고 함께 통곡도 했다. 다방 업자들이 학교 선생님보다 더 잘해 준다는 아이들의 말에 가슴이 오죽 쓰라렸을까. 그 아이들을 선생님 집으로 데려와 먹이고 재우면서 마음의 상처를 치유해 주고, 병원 치료도 받게 하여 웃음을 되찾은 ‘학생’으로 되돌아오게 했다고 한다.

그 다음날 참실대회 발표자로서 통일 교육을 주장하는 김 선생님의 모습은 어제 저녁에 보았던 그가 아니었다. 전교조의 통일 교육 정책에 문제가 많다면서 그는 절규를 했고, 통일에 소극적인 전교조를 질타했다. 그야말로 고승의 할이었다.


나의 메모장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 전교조는 마음의 관성화를 과감히 깨야 하다.
- 우리가 가진 지위에 얽혀 싸움다운 싸움을 못하고 있다.
- 오늘 못 싸운 사람이 어떻게 내일 싸울 수 있겠는가.
- 아이들을 붙잡지 않고는 통일 교육도 없고, 통일도 없다.
- 어른들은 우리 아이들에게 통일된 조국을 물려주어야 하지 않는가.
- ‘통일’은 ‘전교조 사업 중의 하나’가 절대 아니다.
- 민주주의의 진정한 가치를 통일로 완성시켜 나가야 한다.

지난 1월 22일, 전주지방검찰청은 김형근 선생님을 구속했다. 이미 죽어버린 국가보안법을 되살리려는 안간힘인가. 얼마나 논리가 궁색했으면 2005년 5월에 있었던 일을 3년 가까이 지난 지금에 와서 구속을 하겠는가.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나 예쁘죠’ 하는 식으로 구속하는 모양새는 더욱 불쾌한 코미디다. 우리나라의 검찰은 최소한의 자존심도 없는가. 이렇게 정권의 눈치를 보아야 하고, 권력 앞에 꼬랑지를 내려야 하는가.

구속되던 날 조선일보의 침묵도 신기하다. 조선일보의 ‘빨갱이 사냥’이 성공을 했으니 대서특필을 해대고, 조선일보의 승리를 자축했어야 하는데 그날 자 조선일보에는 언급이 없었다. 신문을 직접 보지 않고 인터넷에 들어가 아무리 뒤져봐도 그 기사가 보이지 않았다.

통일 교육! 60년 분단국가로서 당연히 해야 할 통일 교육의 현장은 사실 캄캄하다. ‘통일’이라는 말에 가슴이 설레는 아이들은 거의 없다. 통일을 원하느냐고 물으면 100명 중 5, 6명 정도만 원한다고 한다. 반드시 통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해도 공감하는 눈빛을 얻기가 쉬운 일이 아니다. 김대중 대통령이 방북을 한 후 통일에 대해 긍정적이었던 반응은 어느덧 차갑게 식어가고 있는 게 현실이다. 반공 교육을 철저히 받은 어른들이 아직도 여기저기 건재하고, 아주 뜨거운 가슴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통일을 가르쳐야 비로소 아이들의 마음을 열 수 있는데 그런 가슴들마저 자꾸 지치게 하고 있는 것이다.


누가 누구를 단죄(斷罪)하는가


검찰은 이제 분단국가의 국민의 한 사람으로, 부끄러운 국민의 한 사람으로 되돌아가라. 통일의 엄숙한 과제 앞에 옷깃을 여미라. 수의(囚衣)를 입어야 할 사람은 김형근 선생님이 아니라, 통일에 대한 뜨거운 염원을 감히 가두는 당신들이다. 당신들이 먼저 역사의 법정에 서서 단죄를 받아야 한다는 것을 명령처럼 들어라.

김형근 선생님은 지금 감옥에 있을 사람이 아니다. 그 뜨거운 가슴을 하루속히 아이들 곁으로 돌려보내라.


2008. 3. 17(월) / <시민사회신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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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학년 교무실에 진풍경이 벌어졌다. 몇 명 아이들이 우르르 교무실로 찾아와서 새로운 반편성에 대해 불만을 토하는 게 아닌가.

우리 학교는 4년 전부터 수학과 수준별 수업을 하고 있는데, 학년이 바뀌어 새로운 반을 발표하자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이다. ‘눈높이 수업’이라고 이름을 붙여서 2개 학급 70명의 학생을 창의반(상) 20명, 탐구반(중) 35명, 원리반(하) 15명 정도로 3개 학급으로 편성해 운영하고 있는데, 원리반(하)에서 탐구반(중)으로 올라간 아이들이 그냥 원리반에 있게 해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었다. 성적이 향상됐으니 원리반에서 탐구반으로 올라간 것을 당연히 기뻐해야 할 아이들이 오히려 원리반에 그대로 남겠다니 뜻밖인 것이다. 몇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정년을 1년 앞둔 원리반 담당 선생님은 난감한 표정으로 아이들을 설득하고 있었다.

집단 판단 장애 보이는 어른들

3월 6일, 신입생들이 일제고사를 보았다. 새로움에 대한 기대와 불안감이 겹치는 꼬맹이들이 입학하자마자 시험을 본다니 ‘이런 게 중학교인가 보다’ 할 것이다. 10년 만에 부활되는 이 시험이 앞으로 어떻게 작동을 하고, 어떤 각박한 현실을 만들어 갈지 아이들이 어찌 알겠는가. 그러나 어른들은 다 안다. 그래서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에 대해 긴장을 하는 것이다. 학부모도, 교사도, 학교도 교육청도, 교육부까지도 그 결과를 날카롭게 지켜볼 것이다. 이제 일제고사의 결과물은 학교 현장을 더욱 옥죄는 훌륭한 근거가 될 것이다. 학부모와 교육청은 학교를, 학교의 교장은 교사들을, 교사들의 스트레스는 고스란히 아이들에게 쏟아질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의 어른들은 ‘교육’ 앞에서는 ‘집단 판단 장애’를 일으키는 듯하다. 우리 사회가 아이들을 얼마나 학대하고 있는지에 대해 도무지 무감각하다. 새로 들어선 정부가 앞장서서 경쟁을 부추기니 전국의 교육감 나리들은 신바람이 나 있다. 이명박 정부의 교육 정책의 핵심은 자율과 경쟁이라 한다. 자율, 얼마나 좋은 말인가. 그런데 묻는다. 누구의 자율인가? 학생의 자율인가? 아니다. 교사의 자율인가? 천만에 말씀이다. 학생과 교사에게 자율이 주어졌다면 그것은 마음껏 경쟁하라는 그런 자율뿐이리라. 피 터지게 경쟁할 수 있는 자율, 우리 새 정부가 들어서자마자 준 선물이다.

앞으로 자율은 빛나리라. 학교 현장에서 관리자들은 아이들의 성적을 높이기 위해서 경쟁적으로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할 것인데, 그 다양함과 기발함이 자율로 포장될 것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학교의 모든 정보가 공개되면 앞으로 아이들의 성적에 학교의 운명을 다 걸어야 한다. 그러자니 다른 학교보다 성적을 올리기 위해서는 공부의 양을 늘려야 할 것이고, 공부하는 시간을 늘려야 할 것이다. 24시간으로는 터무니없이 모자라니까, 우선 아이들이 잠을 덜 자게 하는 방안들이 강구될 것이다. 0교시로는 모자라니 등교 시간을 더욱 앞당길 것이다. 이제는 고등학교만 아니라 중학교에도 ‘학생’은 없고 다만 ‘수험생’만 있을 것이다. 수험생에게는 점심시간도 사치이니 밥 먹는 시간도 쥐어짤 것이다. 능력(?) 있는 교장 선생님이 있는 학교는 교실의 기숙사화 운동을 전개할지도 모른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이젠 방학을 그냥두지 않을 것이다. 자율이라는 이름으로 단 며칠간의 방학마저도 가차 없이 빼앗는 학교가 늘어날 것이다. 2월은 어쩔 것인가? 이미 고등학교에서는 2월 새 학기를 운영하는 학교도 늘어나고 있다.


사람 냄새 없는 후진 교육 


어른들에게 묻는다. 모든 아이들을 학교와 학원에 철저하게 가둬놓고 어른들끼리만 무슨 재미로 살려고 그러는가? 이렇게 경쟁심으로 무장한 우리 아이들에게 앞으로 어떤 사회를 만들어 가기를 바랄 것인가. 사람 냄새가 사라진 사회에서 아이들에게 어떤 행복, 어떤 미래를 추구하라고 말해 줄 것인가?

오늘날 경쟁력이 필요하다는 말은 백 번 옳다. 그러나 경쟁을 시키면 경쟁을 하게 되고, 경쟁을 하게 되면 무조건 경쟁력이 생긴다는 야만적인 공식을 신앙처럼 믿는 나라는 후진국이요, 참으로 후진 나라다. 원리반에서 탐구반으로 올라가는 것을 마다 하는 그 ‘바보’ 같은 아이들에게서 우리 어른들은 무엇을 배울 것인가?

2008. 3. 10(월) / <시민사회신문>에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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