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걷는 걸 좋아한다. 하루에도 걷는 거리가 제법된다. 재 본 적은 없지만 대충 십리는 넘지 않을까 싶다. 오래된 습관이기도 한데 몸과 마음을 더 없이 편하게 해준다. 몸이야 너무 많이 걸으면 피곤해지지만 운동삼아 걷는 셈이기도 하니 이로울테고 마음을 여유롭고 넉넉하게 해주는 데야 걷기만한 게 또 있을까 싶다.
걷는 묘미를 체득한 후부터 빨리 걷는 경우란 거의 없고 뛰기란 내 인생에서 영원히 없어졌다. 뛸 일이 뭐가 있을 것인가. 원체 숨이 차 오르는 걸 싫어했으니 걷기 체질이라고 해야 솔직한 말이기는 하지만.
걷기를 즐기기 위해서는 혼자 걷는 게 제 격이다. 누군가와 같이 걸을 때는 즐거움을 음미할 수가 없다. 대화에도 신경써야 하고 보폭도 맞추어야 하니 걷는 즐거움과는 거리가 멀다. 혼자서 마음의 행로를 따라 느릿느릿 허허롭게 걷는 즐거움을 어디에다 비하랴.

이렇게 혼자서 걷는 즐거움은 내가 개발한 몇 안되는 행복 중의 하나다.
귀한 보물을 혼자 감상하며 거기에 도취되듯이 나는 매일 매일 아무도 모르게 걷는 즐거움에 빠져든다. 그런 취미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잘 기억나진 않치만 곰곰히 생각해보면 철들기 시작하면서부터가 아닌가 싶다. 세상을 발견하고 세상을 살피고 세상을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 나만의 걷기를 시작했던 것 같다. 이를 자아(自我)의 발견이라고 하던가. 어쨌든 생각할 일들이 많아지고 해결해야할 일들도 많아지고 인생의 무게를 하중으로 느끼기 시작하면서부터 세상과 거리를 두고 차분하게 살펴보기 위한 나름대로의 나만의 시공(時空)을 요령껏 마련한 셈이다.

바지 주머니에 혹은 잠바 주머니에 두 손을 쿡 찌르고 허리를 약간 굽힌 듯이 하고 어깨를 흔들며 뉘엇뉘엇 걷는다. 그런다고 해서 인생살이의 여러 문제들이 과연 확실하게 풀리더냐 하고 당신이 묻는다면 할말은 없지만, 그런 대로 많은 문제들이 풀렸다고 말할 수는 있다.
때로는 사람들과 어깨를 비비며 번잡한 거리를 걸을 때도 있고 때로는 호젓한 공원길을 걸을 때도 있지만, 이 생각 저 생각하면서 구름을 쳐다보기도 하고 지나가는 이의 그림자를 내려다보기도 하면서 한참을 걷다보면 그 동안 고심하던 대부분의 문제들이 머리 속에 남아있지 않는 걸 발견한다.

아무 것도 머리 속에 남아있지 않다는 건 무엇을 뜻하는가. 나는 그걸 문제가 사라진 것이고 녹아버린 것이고 풀린 것이라고 여긴다. 실은 생각 자체가 없어진 것이겠지만. 아무려면 어떤가. 생각하던 것들, 보고팠던 것들, 그리고 그리워했고 가슴져려 했던 그 모든 일들이, 아아, 영원히 잊혀질 수 없는 사랑하던 그 모든 것들이 영원히 잊혀진다한들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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