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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걱정없는세상/회원의 이야기

[송인수] 내 삶의 이야기(2) : 나와 박정희 대통령

아이들과 수업할 때 내가 들려주었던 내 인생 이야기 두번째 것입니다... 뭐 자랑할 일도 아니고, 이상하게 꼬인 인생이지만, 그런 꼬인 인생을 통해 새로운 길이 열리고, 그것을 통해서 교사가 되고, 오늘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을 돕는 자리에 있다 생각하니, 지금의 삶을 함부로 이야기할 것이 아니다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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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박정희 대통령


내가 늘 하는 이야기이지만, 인생은 한번으로 족하다. 지난 시절에 대한 생생한 기억을 가지고 내 인생을 다시 살라고 하면 나는 반복할 자신이 없다. 10대 때는 10대 대로, 대학 다닐 때는 대학 때대로, 그리고 결혼해서는 결혼해서... 쉼 없는 인생이 자주 고달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다면 이라는 가정을 하지 않고 “인생은 한번으로”라고 말하는 것은 고달픈 인생살이지만 그 속에서 내가 얻은 기쁨이 있기 때문이다. 그 모든 과정 속에서 내가 살아 계신 하나님을 만나고 알고 사랑하고 그것을 통해서 인생을 알아 가는 것, 그것은 생의 어떤 다른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고귀한 것이었다.

 

또한 즐거운 인생을 산 사람에게 “인생은 한번으로 족하다”는 말이 비관주의적으로 들리겠지만, 고생스럽게 인생을 산 사람에게 그 말은 “이 모든 괴로움을 또 다시”라는 말을 했던 전혜린 식의 생에 대한 감사가 담긴 것으로 이해되어야한다. 인생 새옹지마라고 아이들에게 내가 가끔씩 내 인생을 돌아보면서 해주는 이야기를 오늘은 하고 싶다.

 

어린 시절 지독히도 가난하고 고통스러웠던 지난 날, 학교 다니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던 중학교 3학년 어느날, 담임 선생님이 불쑥 이런 이야기를 하셨다. “금오공고를 갈 사람들 신청하기 바란다.” 금오공고는 70년대 후반 박정희 대통령의 고향 구미에 세운 공고로서, 기숙사비, 학비, 졸업 후 취직이 완전 보장되는 곳으로 내가 중 3때부터인가 처음 학생을 뽑는 신설학교였다. 그리고 한 학교에서 상위 2-3% 한 명만 추천이 가능한 공고였다. 돈 없고 공부 잘하는 아이들에게는 정말 꿈같은 곳이었다.

 

나는 급한 마음에 신청을 했다. 가난한 가정, 전망 없는 고통스러운 가정사를 벗어버리고 그렇게 국가에 의지해서 내 인생을 시작하고 싶었다. 다행히 뼈빠지게 공부한 덕에 성적은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나이였다. 66년 3월생까지가 신청자격이 있었는데 나는 정확히 6개월이 부족했다.  내 나이가 원래 64년생이나 초등학교 가기 전, 62년으로 호적에 올라와 있었고, 그것을 고치라고 고향 분에게 부탁했더니 면사무소에서 똘똘치 못하게 정리해서 결국 66년으로 주저 앉아 버렸던 것이다. 그래서 결정된 내 주민등록번호 660***. 그것은 동생의 생일이었다.

 

나는 고민했다. 6개월 갭. 이 고생스러운 시간을 돌파할 수 있는 해방의 기회가 6개월의 차이로 날아간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아팠다. 어머니와 의논하여 편지를 썼다. 그때를 생각하면 내가 왜 그랬을까 참 황당하기만 하다. 물론 어머니의 강요도 한 몫 했지만 여하튼 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박정희 대통령께 편지를 썼다. “대통령 각하... 공부를 하고 싶어도 가난 때문에 어떻게 할 수 없는 학생입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세우신 공고에서 공부하고 싶으나 나이 때문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선처 부탁합니다” 등의 내용이었다. 편지를 부칠 때 송인수 “올림”으로 해야할지 “드림”으로 해야할지 고민하다가 고쳐 쓴 것까지 기억나는 것을 보면 무척이나 신경이 쓰였나 보다. 그리고 한동안 시간이 지났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수업 중에 학교 사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저 선생님, 송인수 학생 교무실로 보내 달래요.” 영문을 모르는 나는 사환을 따라 교감 선생님 앞에 섰다. 교감 선생님은 처음에는 어이가 없이 웃다가 나중에는 화를 내시면서 “이 편지 네가 썼냐”고 호통을 치셨다. 나랏일에 바쁜 분에게 사사로운 편지를 보냈다고 청와대 비서실에서 징계를 명령하여 강원도 교육청, 원주시 교육청, 우리 학교로 공문이 이첩되어 내려온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한달 동안 반성문을 썼다. 다시는 이렇게 사적인 문제로 대통령을 불편하게 하지 않겠다고...

 

그리고 결국 나는 원서를 신청할 기회를 박탈당했다. 그 대신, 함께 희망했으나 나보다 등수가 다소 낮아 대기 중에 있던 엄무용이라는 친구가 추천되었고 그 아이는 당당히 합격하였다. 졸업식 날, 그 친구는 멋있는 금오공고 제복을 입고 학교에 와서 담임선생님 앞에서 거수경례를 하였다. 나이만 아니었다면 그 친구가 서있는 저 자리에 내가 서 있어야 했고, 저 친구가 입고 있는 멋있는 제복을 내가 걸쳐 입고 있을 수 있었는데 생각하니 마음이 무겁고 기가 막혔다. 내 인생이 왜 이다지도 풀리지 않는지 참 알 수가 없었다.

 

그리고 결국 나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장학금 혜택 때문에 1류 고등학교인 인근 원주고등학교 진학을 포기한 채, 재단이 같은 고등학교인 대성고등학교로 진학하였다. 고등학교 기간. 내 인생의 가장 힘겨운 시간이었다.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간... 부모님의 불화와 경제적인 고통, 그리고 일년 지각을 몇 십 회 할 정도의 닭장사 일. 집이 가난하여 제 때 빛을 갚지 못해 씨돼지를 잡아가는 마을 사람들 앞에서 오열하시는 어머니를 따라서 서럽게도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리고 지금도 잊지 못하는 고등학교 1학년 5월. 어버이 주일에 중고등부 대표로 부모님께 드리는 편지를 전체 교인들 앞에서 읽다가 감정에 복받쳐 흐느끼는 내 모습을 보고 함께 우시던 많은 집사님들... 어느 추운 겨울, 나는 동네 언덕에 올라 기드온 성경 표 2 쪽에 우리 가정을 힘들게 한 사람들, 가난, 운명에 복수하기 위해서 법대에 가리라 맹세하며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는 글을 썼다. 지금도 싸-하니 되살아 오르는 아픔.

 

특별히 달라질 것 없는 고단한 인생살이였기에 고등학교 3학년 때 찾아온 육군사관학교 지망의 기회는 또 다른 해방구였다. 육군사관학교는 금오공고와는 비할 수 없이 좋은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육군사관학교의 제복은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나의 살던 고향 원주는 1군 사령부가 있는 곳. 대령, 중령 등은 지천에 깔렸고 가끔씩 지나가는 장군들의 검은색 군용 자가용은 정말 대단한 위용이었다. 그러니 일병, 이병은 인간 같아 보이지 않았다. 학생회는 학도호국단으로 편성되어 점심시간마다 6.25 시가행진을 대비하여 분열 연습을 하였고 그때 연대장 대대장 친구들이 헌병들처럼 바지에 스프링과 구슬을 넣어 찰랑찰랑 거리는 소리를 내며 금색 손잡이에 은색 찬란한 군도를 차고 다니는 모습은 너무도 부러웠다.

 

조금의 주저함도 없이 나는 육군사관학교에 입학원서를 냈다. 그러나 어이없게도 나이가 다시 문제가 되었다. 고민... 아 내 인생은 왜 이리 풀리지 않은 것일까. 겁 많고 소심한 나였지만, 이 운명의 도전 앞에서 어머니는 그냥 주저 않지 않게 했다. 이젠 내 스스로가 지금은 문제 앞에 그냥 주저앉지 않게 되었지만, 그런 습성은 아마 그때 어머니의 덕을 많이 본 것 같다. “인수야. 우리 나이 고치자.” 이런 어머니의 말씀으로 나는 치아를 통한 연령 증명 진단서 등 무려 50여가지 정도의 서류를 다 갖춘 후, 우리는 여름 방학 고향인 충청도 홍성 지원에 나이 정정 재판신청을 했다. 어느 날 재판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던 나에게 편지가 날아왔다. 패소 판정. 날벼락 같은 통지였다. 막다른 골목에 이르기까지 부딪혀보리라. 다시 나는 박정희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를 판사에게 보냈다. 나의 딱한 사정을 구구 절절 정리하여... 그리고 답장. 반가운 마음에 나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열어보았다. “학생의 딱한 처지는 이해가 가나 나로서도 어찌할 수 없으니 상급법원에 상고하기 바랍니다.”

 

그래서 결국 사범대학에 진학했다. 사대는 내가 원한 곳이 아니라 가난과 점수와 또 우리 시대 학력주의의 힘을 벗어나지 못한 평범한 학생으로 불가피하게 선택한 곳. 어차피 군대는 가야하고 그래서 2학년 때부터인가 ROTC를 신청했다. 이번에는 동일한 실패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학군단장에게 아예 나이와 관련하여 사전 내락을 받았다. 마라톤에 일등을 하는 등 신체검사를 우수한 등급에 통과하였으나, 역시 나이로 인해서 ROTC 지원에 실패했다. 이번에는 국방부에서 거부했던 것 같다.

 

결국 나는 군대를 면제받고 말았다. 가난한 가정, 몸이 불편하신 부모님... 내가 군대를 가면 서류상 우리 집에 부양능력을 가진 자식이 없다는 이유로 (실제적으로는 동생도 부양능력이 있기는 하지만 나처럼 2년 늦게 호적 나이가 기록되어 있다)  얻어진 의외의 판정이었다. 춘천 입영 검사소. 군대 가기 위해 신체검사를 받기 위해 수 백 명이 줄 서 있는데 나를 비롯해서 여섯명의 면제 후보자들이 미리 심사를 받았다. 무학자(無學者) 2명, 수형자(受刑者) 3명 그리고 나. 대학 재학생으로 그들과 함께 면제 판정을 받는 나를 검사관들은 이해할 수 없어 했다.

 

그 덕에 나는 어쨌든 내 모든 사회적인 경력에 2년의 덤이 붙었다. 중고등학교 다닐 때는 체력검사에서 유리할 정도 밖에 없었는데, 남보다 교직을 2년 일찍 시작한 셈이고, 군대 안 갔으니 2년 더 많이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었던 셈이고, 남들이 정식 퇴직할 나이에 돈 받고 명퇴 신청을 할 수도 있다. 물론 내가 그때까지 교직에 남아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내 인생을 회고하면서 생각해 본다. 내가 만일 그때 금오공고를 갔었다면, 육군사관학교를 갔었다면... 인생에 있어서 “만약”은 없고, 그때 그 인생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었겠지만, 지금 내가 이렇게 즐기고 있는 교사로서의 삶은 누리지 못했을 것이다. 사랑하는 아이들, 기독교사운동, 좋은 선생님들과의 만남, 그리고 하나님...

 

그때 나는 내 인생이 왜 이렇게 풀리지 않는가 고민하였지만, 인생이 가장 풀리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시기, 내 인생의 위기의 시기가 실제로는 위기가 아님을, 그리고 내가 가장 원하는 일이 성취된 때가 인생 전체의 여정 속에서 볼 때는 성공이 아닐 수 있음을 온 몸으로 느끼곤 했다. 그리고 그런 이야기를 지금 경제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아이들, 절망 속에 있는 아이들에게 가끔씩 해주곤 한다.

 

나는 자신의 인생에 대한 성공의 평가를 “네가 평생 몸 담아온 직업을 자식에게 물려주고 싶은가”라는 물음으로 내리는 것이 정확하다고 본다. 운동 선수 중에서는 이런 대답에 ‘예스’라고 대답한 대표적인 사람이 “차범근과 강만수 감독”이다.

 

그런 의미에서 내 아들 여명이, 둘째 민서가 나처럼 교사가 되어도 좋으냐고 자문해 본다. 그 질문에 내 대답은 “absolutely yes!"이다. 그냥 봉급쟁이 좀스러운 교사가 아니라, 아이들을 통해서 시대와 민족과 교회를 품는 기개 있는 교사. 내가 존경하는 김교신 선생님처럼, 그렇게 신앙과 교육과 인격과 정의가 어우러진 빛나는 인생을 사는 교사,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 온전히 쓰임 받는 기독교사! 내 아들이 그런 교사가 되어 주면 좋겠다. 이렇게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을 보니 나도 조금은 내 인생에서 성공을 했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