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사교육걱정없는세상/회원의 이야기

[정병오] 역사란 무엇인가?

“형! 형은 이렇게 자신의 모든 기득권을 버려가며 우리 시대 불의와 문제와 싸우고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을 위해 자신의 인생을 던지려고 하고 있는데, 이러한 형의 행동이 옳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하지? 형으로 하여금 이러한 삶을 살게 하는 근거는 무엇이지?”

“그것은 ‘역사’야!”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대학 시절 비교적 친하게 지냈던 운동권 핵심 선배와의 대화의 한 구절이다. 물론 그 선배가 믿고 자기 행동의 근거로 삼고 있는 이 ‘역사’라는 것이 막연하게 긴 역사적 견지에서 볼 때 정의가 결국 승리한다는 낭만적인 생각이었는지, 아니면 마르크스의 역사발전 5단계설에 근거해서 자본주의 이후에 사회주의가 도래하는 것이 확실하고 이 사회주의의 도래를 앞당기는 것이 역사적 사명이라는 사회과학적 생각이었는지 명확하지 않다. 아니면 이 두 가지 생각이 포함되어 있는 말인지도 몰랐다. 어쨌든 그 상황에서 그 말의 의미를 더 자세하게 물을 필요가 없이 그도 나도 이 ‘역사’라는 단어 앞에서 이심전심의 마음을 가졌다.


역사의 배신, 사람의 변절

하지만 역사는 그 선배의 믿음대로 움직여주지 않았다. 오히려 역사가 ‘역사’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자신을 드렸던 사람들의 믿음을 배신했다는 것이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우선 수많은 사람들이 역사에 대한 믿음의 근거로 막연하게 붙들고 있었던 소련을 비롯한 동구 현실 사회주의 국가들이 그 누구도 예측하지 못했던 너무도 빠른 시간에 일시에 무너져 버렸다. 그러나 그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민주화가 진행되긴 했지만 그 진행방식은 민중이 주인이 되는 방식이 아닌 정치가들의 권력욕과 야합으로 얼룩진 방식으로 진행되었고, 민주화의 결과로 개인의 일상적인 자유와 인권의 진전이 있긴 했지만 더 많은 부분은 언론권력과 각종 힘있는 이해집단들의 힘을 실어주는 결과로 나타났다. 그들이 신뢰했던 노동자들은 노동조합을 통해 시대 변혁의 힘을 얻었지만 곧바로 작은 기득권으로 변해버렸고, 또 다른 민중인 비정규직 문제 해결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다. 민주화세력이 정권을 얻고 개혁의 명분을 수행하고 있지만, 이제 개혁이 아닌 빵을 요구하며 과거로 회귀하려는 백성들의 요구 앞에서 당황해하고 있다.

이렇게 그들이 믿었던 사회주의, 노동자, 민주, 개혁이 절대신이 될 수 없고, 역사가 반드시 우직하게 정의의 길에 서는 자의 편에 서지 않고, 간사하게 자신의 이익을 위해 역사의 물꼬를 비틀어놓은 자들의 물길을 따라 역류하는 경우도 많다는 사실 앞에서 많은 사람들이  좌절했다. 그래서 민주화운동 출신 정치가들 중에도 변신에 변신을 거듭한 사람들이 많았고(이중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좋게 봐주려고 해도 ‘변절’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밖에 없는 사람들도 있다), 일상적 시민의 삶으로 돌아간 이들 가운데도 부동산 파동과 주식 폭등, 사교육 팽창의 흐름을 주도하거나 이 흐름의 핵심에서 이익을 누리는 사람들도 많이 생겼다. 물론 개개인의 삶이 다르기에 획일적으로 말할 수 없는 부분이 많긴 하지만 이것이 현재 우리 사회를 주도하는 40-50대, 70-80년대 학번들의 한 단면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그들이 대학 시절에 꿈꾸었던 것을 제대로 실현시키지 못하고 또 하나의 기득권 세대가 되어가는 원인에는 그들이 믿었던 ‘역사’에 대한 좌절이 한 몫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과연 사람이 희망인가?

민주화세대의 좌절과 실패를 바라보면서, 그들이 역사에 대한 믿음을 근거로 그 시대의 불의와 싸우고 민중을 위해 자신을 드렸던 그 삶이 지극이 선하고 아름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역사로부터 배신을 당하고 심지어 그들 자신마저도 역사의 걸림돌이 되고 있는 원인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과연 역사의 본질 자체가 ‘배신’이고 역사가 결코 선의 편이 아닌데 그들이 잘못 이해하고 짝사랑했던 탓일까? 아니면 그들의 믿음에 또 다른 오류가 있었을까?

최근에 드는 생각은 민주화 세대가 품었던 ‘역사’에 대한 믿음의 이면에는 ‘사람’에 대한 믿음이 있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 어쩌면 그들이 진정으로 믿었던 것은 ‘역사’가 아니고, ‘사람, 혹은 사람의 선한 의지’였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을 배신했던 것도 ‘역사’가 아닌 그들이 믿었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들을 배신한 것은 그들이 믿고 신뢰했던 공산국가의 지도자들, 민주화에 앞장섰던 정치인, 노동자 농민, 시민이었고, 나아가 그들과 함께 운동을 했던 동지들이었을 것이다. 심지어 자기 자신도 자신을 배반하는 단계로 나아간 경우도 많을 것이다.

결국 사람의 약함과 악함에 대한 처절한 인식의 부재와 역사에 있어서 사람이 차지하는 역할과 한계에 대한 고민의 철저하지 못함, 그리고 역사의 주인되신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오만이 역사의 좌절을 맛보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역사, 사람을 다루시는 그 분의 손길

사실 나는 대학 시절에는 역사를 별로 신뢰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고 그 분이 가장 선하고 공의롭게 역사를 진행한다는 사실을 관념의 세계에서는 인정했지만 현실에서는 인정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역사를 신뢰하던 그 사람들이 역사의 걸림돌에 걸려 넘어지고, 심지어 그들 가운데 일부가 역사의 걸림돌이 되는 현상을 지켜보면서, 그리고 사람들이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에서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정의가 실현되되, 완벽한 의가 아닌 상처와 모순을 가진 형태로 의가 실현되고, 또 다른 과제를 남기는 방식으로 역사가 진행되는 것을 보면서, 역사를 운행해 가시는 그 분의 깊이와 오묘함을 약간은 느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다.

역사는 매우 복잡한 기계와 프로그램으로 구성된 어떤 세계가 아니다. 오히려 선과 악의 자유로운 선택이 가능한 인격체인 인간들이 만나서 만들어가는 세상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 운행은 기계적인 선과 악에 대한 심판이 아닌 열길 물속보다 깊고 복잡하며 변화무쌍한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수많은 선악과 탐욕, 사랑과 미움, 자기애와 권력욕, 구조악과 집단이기주의 등의 문제를 다루어가는 것이다. 그 분은 이 가운데서 악을 제어하고, 이 세상을 보존하시며, 낮은 자를 높이시고, 높은 자를 낮추시는 일을 하고 계신 것이다. 무엇보다 타락한 인간 세상과 역사의 한 가운데 아들을 사람의 형상으로 보내시고, 그의 죽음과 부활을 통해 자기 백성을 부르시며, 그 부르신 백성들의 소명과 역사에 대한 응답을 통해 역사를 만들어갈 뿐 아니라 부단히 하나님의 사람을 만들어가고 계신 것이다.


내가 헤아릴 수 있는 역사는 시간적으로는 불과 20여 년, 그리고 공간적으로는 나의 경험과 지식이 닿는 지극히 제한된 영역에 불과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원하심과 그의 편만하심을 생각할 때 한 점에 지나지 않고 티끌에 불과하다. 이러한 인간의 유한을 그의 영원으로 품으시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그 나름의 뜻을 두고 가장 합당하게 다루시며,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는 궁극적인 선과 의를 행하시는 하나님의 역사 통치를 생각할 때, 내 머리로 다 이해할 수 없는 수많은 삶의 현장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뜻을 묻는 겸손함으로 서게 된다. 그리고 내게 주어진 ‘지금과 여기’라는 역사의 현장 가운데서 어떻게 살아야할지 두렵고 떨림으로 서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