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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걱정없는세상/회원의 이야기

[이공훈] 좋은 교사와 이공훈의 만남

시험제도, 우리의 생각을 뛰어 넘어야 합니다 이공훈(학벌없는사회만들기 대표)

이공훈 | 흥사단 교육실천위원회에서 기획실장을 맡아 일했었고 현재는 학벌없는사회만들기 (www.goodbyehakbul.org) 대표로 일하고 있다. 저서로 『섀먼 에듀』라는 교육소설(2002)과 『교육, 시장과 정부에서 길을 찾다』 (정영섭과 공저, 2006)가 있다.

3불정책에 관한 논쟁이 뜨겁다. 대통령까지 나서 방어하고 있지만, 소위 명문대학과 보수언론의 3불 정책 해체 주장이 어느 때보다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다. 좋은교사운동의 여론조사 결과, 3불정책 유지를 원하는 입장이 다수였다. 과연 대학의 경쟁력을 도모하면서도 공교육 정상화를 지킬 수 있는 해법은 없는 것일까? 이런 질문에 오랫동안 고민하고 대답해 온 이공훈 ‘학벌없는사회만들기’ 대표를 만나 보았다.


A(좋은교사) : 선생님께서는 오랫동안 학벌타파 운동에 전념해 오셨습니다. 학벌타파 운동의 양대 단체인 ‘학벌없는사회’와 ‘학벌없는사회만들기’의 차이를 설명해 주십시오.

B(이공훈) :‘학벌없는사회’나 ‘학벌없는사회만들기’는 우리 사회의 학벌 문제의 심각성에 대해서는 동일하게 인식합니다. 그러나 제시하는 대안이 다릅니다. 원래는 같이 활동하다가 서로 뜻이 달라서 갈라진 것입니다. ‘학벌없는사회’는 고등교육 체제, 즉 대학을 국가가 운영하자는 것입니다. 국립대 평준화가 그런 맥락에 놓여 있습니다. 그러나 학벌없는사회만들기(이하 학사만)은, 대학은 시장 책임제로 가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대학을 국가가 책임지느냐, 시장이 책임지느냐의 문제로 귀결됩니다. 제가 활동하는 ‘학사만’은 약 80%의 사립대학과 75%의 사립대학 재학생이 있는 나라에서 고등교육을 국가 책임제로 했을 때, 제대로 운영하려면 대학 소유권과 운영권의 국가 환수가 필요한데, 그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봅니다. 물론 엄청난 돈이 드는 것도 문제지만 그럴 필요성도 전혀 못 느끼지고요. ‘학사만’은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이 공정하게 경쟁하는 구도를 구축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현재의 불공정 경쟁 구조를 먼저 시정해야 한다고 보는 것입니다. 그것이 학벌 타파의 시발점이 될 것입니다.


A : 국립대학과 사립대학이 불공정한 경쟁을 하고 있다고 보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B : 현재 각 대학은 국립이나 사립이나 똑같은 커리큘럼을 운영하고, 동일한 학위를 줍니다.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립대학은 등록금이 사립대에 비해 절반도 되지 않습니다. 또 국립대학은 국가라고 하는 배경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사립대가 국립대를 능가할 길은 없습니다. 그것이 수십 년간 국립대학들이 대학 사회에서 절대우위에 서게 된 이유라고 생각합니다.

국가가 왜 국립대학을 운영하려고 하는지 성찰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저는 국립대학 출신들이 자신의 권력을 승계하려는, 보이지 않는 욕구가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정치 권력, 사회 권력을 후배들한테 넘겨줄 때 제일 안전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국립대학 출신들이 국립대학을 유지하려고 하지요.

우리는 메이저 언론사들에 대해서도 벽을 느낍니다. 메이저 언론사들은 국립대학 출신들, 특히 서울대 문과대 출신들이 장악하고 있습니다. 그런 메이저 언론사들이 학벌을 타파하자는 우리의 주장을 실어 주지 않습니다.

학벌이 무엇이냐구요? 학연을 매개로 한 국가 권력입니다. 비공식적인 권력 체제인 셈이지요. 우리나라는 국립대학 출신들이 사회를 압도적으로 장악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국가의 중요한 의사결정이 그들의 이익과 결코 반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의 어떤 교육 정책도 국립대학, 특히 서울대의 이익과 반해서는 시행되지 못합니다. 최소한 타협이라도 되어야 시행되지요. 그것은 이미 국립서울대학교가 학벌의 반열에 올랐음을 말합니다. 혹자는 연고대도 학벌 체제 아니냐고 항변합니다만 그것은 국립대학에 대항하는 대항학벌이고 민간학벌로서 학벌이라고 말할 게 못 됩니다. 지방에서는 지방 국립대학이 지역의 정치, 경제, 사회를 장악하고 있습니다.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국립대학이 사립대학과 아무런 기능적 차이가 없지만 특혜를 받는 것은 학벌 말고는 설명이 불가능합니다.

대학에 들어가는 나이가 19세에서 20세 전후입니다. 그때 이미 모든 것이 다 결정됩니다. 이후 대학 4년간의 노력은 큰 의미가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들 머리를 싸매고 있지요. 국립대학에 들어가는가 안 들어가는가가 이후의 60년 인생을 지배합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우스운 일이 우리나라에선 지극히 자연스럽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누가 학벌이 있느니 없느니 하는 개인 차원으로 학벌을 보는 것은 우리의 관심사항이 아닙니다. 결혼이나 승진이나 취업이나 교유관계에서 말하는 학벌은 국가권력으로서의 학벌과는 다른 것입니다.


A : '학벌없는사회만들기’가 제시하는 해법들을 자세히 설명해 주십시오.

B : 학벌 문제 외에도 초중등교육 정상화, 대학입학제도, 고등교육 문제 등의 교육계 내부의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것 하나 쉽지 않은 문제지요. 우리는 그중 우선적으로 대학 문제부터 풀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대학 문제가 다른 여러 문제를 파생시키는 근원이라고 보기 때문입니다. 대학 문제 중에서도 국립·사립대학 간의 불공정 경쟁과 특혜와 편애, 간섭과 통제, 그리고 국가라는 이름의 배경 등의 문제가 우리 교육을 이 지경으로 만들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대학 문제가 풀리면 교육계의 숙원이라고 할 수 있는 학벌 문제가 풀릴 수 있으며, 입시 위주 교육이라는 정체불명의 교육도 해소될 것입니다. 나아가 초중등교육의 정상화도 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나라처럼 국립과 사립이 양립하여 경합하는 구조는 문제가 있습니다. 국가가 고등정책을 일관성 있게 펼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독일이나 프랑스를 보면 모두가 국립대학이지요. 미국은 사립대학의 나라이고 주립대학이 보완하고 있지만 양립해서 경합하는 경우라고 할 수 없지요. 미국은 기본적으로 사립대학으로 발전한 나라입니다. 후발 주에서 주립대학을 세운 것입니다. 즉, 주립대학은 보완의 의미이지 경쟁의 의미는 아닙니다. 실제로 주립대학은 사립대학화되어 있습니다. 처음에는 주에서, 땅과 건물은 물론 대학의 운영자금도 60% 가까이 부담했지만 지금은 아닙니다. 운영자금 지원도 10-20% 정도에 불과합니다. 이런 미국의 주립대학을 빗대어 우리도 국립대학을 운영하고 지원해야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생떼에 불과하지요.

국립대학이 가난한 자를 위한 대학이 되거나 기초학문을 위한 대학이 되겠다고 해요. 그러나 진심은 그렇지가 않지요. 가난한 자를 위한 대학이 되고자 한다면 가난한 자인지 확인하고 입학시켜야 하지만 그런 적이 전혀 없습니다. 오히려 높은 사회적 배경을 가진 학생들이 들어오고 있습니다. 기초학문을 하는 대학이어야 한다고 하지만 그것도 말뿐입니다. 가장 실용적인 학과를 개설하는 대학이 국립대학입니다.


A : 우리 교육 문제를 다루다 보면 대부분의 문제들이 대학 입시로 귀결되면서 결국 미궁에 빠지고 맙니다. 선생님께서 생각하는 대학 입시의 대안은 어떤 것입니까?

B : 왜 국립대학은 시험 제도를 포기하지 않는 것일까요? 국민들의 인식 속에는 국가가 미래를 위해서 우수한 자들을 지원해야 한다는 생각이 있습니다. 그래서 국립대학들은 국가가 지원할 만한 우수한 자를 입학 시켰다는 것을 입증하고 싶어합니다. 이것을 인증 받는 데 시험만한 게 없습니다. 입학 시점의 서열화가 국가 지원에 불가결한 요소라고 보지요. 그 상상할 수 없는 메리트 때문에 시험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주장하는 분들도 많지요. “시험 제도를 없애는 것이 불가능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차선책이라도 내놔야 하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우리 교육의 한계 안에서 대안을 찾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저는 입학 시험 제도를 그대로 둔 채 시도해 볼 수 있는 건 다 해 봤다고 봅니다. 이미 말했지만 시험 제도가 국립과 사립에 대한 차별을 정당화 시켜 주는 기제로 작용하기 때문에 없어지지 않은 것을 알기 바랍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입학 시험 성적이 우수한 학생이라고 해서 국가가 지원해 주어야 할 명분은 없습니다. 정말 입학 시험 성적이 우수한 자를 국가가 지원해야 한다면 우수한 성적을 낸 사립대학 지원자에게도 등록금 할인을 해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시험 제도가 없어지면 우수한 학생들이 들어가는 대학에 국가가 지원해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착각하기 좋은 기대효과가 사라지는 것입니다. 시험 제도때문에 중등교육이 저렇게 힘들고 사교육 시장이 커진 것을 누가 모릅니까? 그래도 그 시험 제도를 국립대학이 붙들고 있는 것입니다.


A : 선생님의 대안은 지금까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전제들에 대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는데요, 대학 입시에 있어서 공정성은 우리 사회가 금과옥조처럼 붙들고 있는 부분인데, 이것을 포기하고 대학에 맡길 때 과연 국민들이 어느 정도 납득할까요?

B : 국립대학이 시험 제도에 집착하는 것도 큰일이지만, 시험 제도를 없애자고 하면 국민들이 일종의 정신적 공황에 빠져듭니다(웃음). 시험이라는 전제를 접고는 더 이상 논리 전개가 안 되는 것이죠. 그 사고를 우리는 뛰어넘어야 합니다. 입학 시험 제도를 없앤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요? 지금 외국에서 공부한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아졌습니다. 그 사람들에게 “미국 대학에 입학할 때 시험치고 들어갔냐”고 물어보십시오. 미국에도 SAT가 있습니다만, 그 점수 0.1 차이가 입학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지는 않습니다. 제가 입학 시험 제도를 없애자는 것은 그렇게 단 한 번의 시험 0.1점으로 판가름 내는 것을 없애자는 것입니다. 교육 내용은 국가마다 다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를 선발해서 가르치는 것은 가치중립적입니다. 특수성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대학들이 왜 무시험 제도를 도입하지 않을까요? 제가 보기에 그런 입학 제도를 도입하면 서열 상위 대학들이 불리해진다고 보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미국 대학 사회도 서열이 있지만 그것은 입학 서열이 아니라 졸업 서열입니다. 대학 졸업 시점에서의 서열은 아무런 문제가 없습니다. 오히려 바람직합니다. 4년 혹은 6년의 적공을 평가하는 것이니까요. 그러나 우리나라의 대학 서열화는 입학 시점의 서열화에 불과합니다. 학벌 사회가 보는 것은 입학 커트라인입니다. 그 대학이 4년간 얼마나 잘 키웠는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무시험 제도를 수용하지 않는 것은 입학 시점에서 형성되는 대학 서열화에 흡족해하고 있다는 것을 뜻합니다.

시험 제도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나라가 시험 제도를 포기하려면 우선 기득권을 가진 사람들이 기득권을 포기해야 합니다. 그러나 포기 시키려는 여론이 형성되지 않고 있습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나라가 근대화 과정을 거치면서 조선과 결별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신적으로 결별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과거제도입니다. 과거제도는 인재 충원 제도입니다. 지금은 대학에 들어감과 동시에 학벌을 통한 신분을 얻습니다. 물론 관료 충원은 아닙니다만, 사회 상층부에 들어가는 충원이란 점에서는 변형된 과거제도가 지금도 활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과거제도의 긍정적인 효과는 왕권을 강화하는 셈입니다. 그러나 왕권을 강화하면서 생명력을 다 잡아먹었습니다. 박제가 선생이 ‘북학의’에서 과거제도를 없애야 한다는 글을 격하게 썼을 정도입니다. 중국에도, 조선에도 과거제도를 없애야 한다고 주장했던 이들이 꽤 많습니다. 송나라 때 주자도 그 주장을 했습니다. 그렇지만 결국 아무도 없애지 못했고, 과거제도로 왕권은 강화되었지만 사회는 죽어 버렸습니다.


A : 무시험 제도에서는 당연히 공정성, 객관성, 변별력의 문제가 제기되지 않을까요?

B : 제가 객관성, 공정성, 변별력을 포기하자고 하면 다들 황당하게 생각합니다. 먼저 공정성을 생각해 봅시다. 내가 어떤 대학에 들어간 것이 공정하다는 것은 제3자로부터 승인을 받는 것입니다. 어느 교수가 어떤 사람을 교육하고 싶고, 어떤 사람이 어떤 학교에서 배우고 싶다 해도 공정성이 개입되면 제3자에 의해 상황이 달라집니다. 다시 말해 주도권이 대학과 지원자에서 제3자에게 넘어가고 맙니다. 그러니 대학과 지원자의 소신과 철학은 공정성이라는 이름의 단두대에서 희생되지요. 물론 공정성을 얻긴 했지만요. 우리는 대학과 지원자의 소신과 철학을 그토록 말하면서도 그것과 공정성이 충돌하는 것은 보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울 뿐입니다.

다음으로 변별력 문제도 봅시다. 입학 시험 점수로 순위를 매기고 당락을 결정했다고 해서 그 순위가 졸업 때까지 유지되는 것은 아닙니다. 교육은 과정이고 잠재성 개발입니다. 어느 정도 적당한 수준의 점수를 받으면 인정해 주어야죠. 59점은 안 되고 60점은 된다는 것은 교육적으로 매우 파괴적인 일입니다. 도대체 변별력이라는 말이 질그릇을 굽는 도야 과정 중에 있는 아이들에게 과연 타당합니까? 변별력이 선발의 정당성을 위해서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교육적 의미는 아니라고 봅니다.

끝으로 객관성 문제를 생각해 봅시다. 저는 입시를 위한 서열화 지표를 갖지 말자고 하고 싶습니다. 개인의 입장에서는 저 사람이 나보다 못한 것 같은데 내가 못 들어간 대학을 들어갔다는 것에 고통을 받기 때문에 객관적 지표를 요구하겠지요. 그래야 승복하겠다는 것이지요. 서열화의 메리트가 있기 때문에 대학도 이를 포기하지 못하는 것이고요. 그러나 객관적 지표를 요구하는 만큼 주관적 요소들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시험 준비는 입시 요강에 맞추어서 하게 됩니다. 그 과정에서 입시 요강에 없는 것 예컨대 인성이라든가 적성, 장래 포부 같은 것은 완전히 무시되지요. 1-2점이라도 차이가 드러나야 승복하겠다는 것은 입시 결과를 받아들이는 데는 도움이 될지 모르지만 인생 자체에서 많은 것을 잃어버리게 합니다.

미국의 대학 입학 제도에서는 아이들이 4-5군데 원서를 넣어요. 동부 대학의 경우에는 정원의 10배수의 서류가 들어와요. 그러면 대학의 사정관이 3배수 정도를 남기고 일방적으로 떨어뜨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원서를 여러 군데 보내는 것이지요. 불확실성 속에 움직입니다. 대학에서 학생에게 와 보라고 합니다. 대학에서 비행기 티켓도 보내 줍니다. 학생이 올 수 없으면 대학 측에서 학생을 만나러 가기도 하지요. 미국에서 우리나라에 오기도 합니다. 면접 등을 통해서 다시 1.2배수까지 줄입니다. 그 후 교수들이 모여서 다시 치열한 토론을 하면서 0.2배수를 탈락시킵니다. 이 과정이 모두 비밀에 부쳐집니다. 심사 자료는 학생부가 중심입니다. 더 필요하면 추가 서류를 요구합니다. 교사추천서, 지역인사추천서, 에세이 등이 부가됩니다. 학생을 선발하는 과정이 거의 3개월 정도 걸립니다. 한 시점에 모든 학생을 가르지 않습니다. 최종적인 단계에서 “우리가 너를 받아들이면 등록금 낼 거냐?”고 물어보지요. 지원자 측에서 다른 대학에 가고 싶으면 못 낸다고 하겠지요. 이것은 사적 계약관계입니다. 누가 붙고 떨어지고 하는 개념과는 다른 것입니다. 물론 제3자들은 그 결과를 모르지요. 우리처럼 학원, 학교, 동네 마을에 합격 여부가 알려지지 않는다는 것이죠.

저는 선발이라는 말을 쓰면 안 된다고 봅니다. 선발은 우위에 있는 자가 누구를 찍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학을 권력 기관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만큼 시민의 권리가 위축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대학과 지원자가 대등한 관계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입시라는 말도 없어져야 할 말입니다. 입시는 입학 시험의 줄임말로서 대단히 왜곡되어 있는 말입니다. 세계적으로 볼 때 대학이 입학 시험 없이 아이들을 받아들이는 게 정상입니다. 정상을 정상으로 볼 줄 모르는게 우리나라, 그리고 교육개혁론자들입니다.

시험 자료는 참고자료여야 합니다. 유럽에도 독일의 아비투어, 프랑스의 바칼로레아 등의 시험이 있지만 우리와 같이 소수점으로 판가름 나는 시험 개념은 아닙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나라 대학들은 내신이야말로 변별력이 없다고 난리 치고 있습니다. 내신 점수를 가지고 대학에서 뽑으라고 하면 이상하게도 부풀리기 문제가 생깁니다. 변별력 때문이지요. 앞에서 말했듯이, 변별력에 대한 이해가 달라지고 적당한 범위 안에 들면 된다는 것을 받아들인다면 부풀리기가 상당히 사라지겠지만 어쨌든 부풀리기는 막아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학교생활기록부의 평가 기준이 학교 울타리를 넘으면 안 된다고 봅니다. 평가 기준이 지역 단위나 전국 단위로 동일하면 안 됩니다. 학교 단위로만 나온 성적으로는 어떤 아이가 우수한지 모를까요? 전문가라면 다 압니다. 판단이 어려우면 면접해 보면 됩니다. 문제는 그러한 판단의 자율성에 대해 대학과 사회가 인정해 주어야 합니다. 대학이 대학의 권위로 책임의식을 가지고 입학자를 뽑아야 하고, 입학에 동의하는 건 지원자는 인생을 건 고독한 결단을 해야합니다. 그 대학의 권위와 지원자의 고민을 우리 사회가 인정해 주면 얼마나 좋을까요? 생각만 해도 전율하게 됩니다. 그런 날이 과연 올 수 있을는지….

A : 선생님의 주장은 국립대 법인화를 통해 공사립간 공정하게 경쟁시키자는 것, 그리고 그것을 통해 입시의 서열화가 아닌 교육 내용 내지는 교육의 질을 통한 서열화를 만들자는 것으로 압축될 것 같습니다. 이러한 주장은 지나치게 대학을 시장으로 내모는 것이라며 평등주의자들로부터 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으실 것 같습니다.

B : 제 안이 혁신적이기는 하지만 파괴적인 안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대중적 설득을 못해서 힘들기는 하지만 우리 사회가 당연히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진보 세력으로부터 신자유주의자라는 비판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제가 고등학교 평준화를 주장하기 때문에, 시장주의자들은 저를 평등주의자라고 비판합니다. 저는 어디에 서야 할까요? 제 주장의 기저에는 초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이 나누어져 있습니다. 초중등교육은 공교육 논리에, 고등교육은 시장 논리에 서서 보자는 것입니다. 그렇게 볼 수만 있으면 많은 게 보일 겁니다. 저는 양쪽으로부터 공격도 받지만, 옹호도 받습니다.

A : 교육 문제를 다루다 보면 결국 입시 제도와 학벌 사회를 탓하게 된다. 이쯤 되면 교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별로 없다는 회의에 빠져들곤 한다. 또한, 교육을 경쟁과 생존을 위한 도구적 가치로 인식하는 시대의 흐름 앞에서 교육본질론을 이야기하는 것이 참으로 옹색하다는 느낌을 받곤 한다. 이공훈 선생님의 시각은 시대의 흐름에도 부응하면서도 교육의 본질을 훼손하지 않는 접근으로 보인다. 그는 우리에게 도전한다. 0.1점으로 합격과 불합격이 결정되는 것을 당연시하고, 그것을 공정함으로 믿어 왔던 우리의 생각이 바뀌지 않으면 너도 나도 고통 받는 이 현실에 대한 해법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