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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교육걱정없는세상/회원의 이야기

[고춘식] 경쟁이 아니라 치유가 먼저다

새 학년이 시작된 지 한 달 반, 학교 안이나 학교 밖에서 만나는 선생님들마다 아이들과의 관계 문제로 비명을 지르고 싶다고 한다. 선생님들은 새 학년이 되면서 가졌던 기대와 희망을 좀 더 오래 가져가려고 무진 애를 쓰지만, 아이들은 이미 일상으로 돌아가 선생님과 격전을 치를 준비를 해놓고 있다고도 했다.


간절한 소망이 없는 미래의 꿈


지각을 자주 하는 한 학생 때문에 몹시 힘들어하는 담임 선생님이 있어 그 아이를 내가 맡아 집중적으로 대화를 해주고 있는데, 며칠이 지나도 그 아이의 등교 시각은 달라질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자꾸 만나 대화를 하다 보면 경험으로 알듯이 이 아이도 언젠가는 변할 것이다. 그 시기가 문제인데 그것이 한 달이 될지 두 달이 될지 모를 일이다. 때에 따라서는 고등학교에 가서야 달라지기도 하고, 사회인이 되고 나서야 깨우치기도 할 것이다.

가정 사정을 알고 보니 그도 딱했다. 사업에 실패한 아빠는 부부 싸움을 자주 하는데, 번번이 폭력적이란다. 그 폭력은 아이한테 가해지기도 하여, ‘우리가 싸우는 게 다 너 때문’이라면서 가정불화의 원인을 자식에게 돌리기도 한다고 한다. 하나 있는 언니와도 대화가 끊겼다고 했다. 아침마다 늦잠을 자는 동생을 깨우는 과정을 반복하다 보니 둘 사이도 점점 악화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이의 성적도 좋을 리가 없었다.

그 아이에게 가정이란 무엇일까. 자신이 원인이기도 하지만 날마다 살얼음이요, 미움이 감도는 집안을 ‘가정’이라고 할 수 있을까. 학교는 또 이 아이에게 어떤 공간일까. 날마다 지각했다고 교무실에 끌려와서 꾸지람을 들으면서 시작하는 하루는 그 아이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답답한 마음으로 자문을 다시 한다. 이 아이가 학교에 와서 누릴 수 있는 기쁨은 무엇이고, 이 아이에게 학교가 줄 수 있는 기쁨은 무엇인가. 장차 디자이너가 되고 싶다고 했지만 그 소망엔 간절함이 묻어 있지 않은 것 같았다. 그나마 그 아이에게 가장 기쁘고 위로가 되는 것은 친구들과 어울려 웃고 떠드는 일이다.

어느 교육학자가 쓴 글에서,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그때그때 가르쳐 주는 어른이 최소한 20명은 있어야 아이들이 변한다. 아이에 따라서는 마음의 그릇이 남보다 커서, 100명 이상의 애정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기도 한다.”고 했다. 달라진다는 것,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이 이토록 지난(至難)한 일이다. ‘우리 아이가 달라졌어요’라는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관심 있게 보다가도 문득문득 우울해지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한 아이의 잘못된 습관을 고쳐주기 위해서는 이리도 많은 관심과 집중과 정성과 엄청난 인내심과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는 것이니 말이다.

학교 현실을 모른 사람들은 한 학급의 아이들 수가 35명 정도로 크게 줄었으니 얼마나 좋으냐고 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지금 많은 선생님들은 학급당 65명, 70명 시절이 훨씬 그립다는 말을 자주 한다. 오늘의 많은 부모들이 옛날에 6, 7명의 자식을 키울 때가 오히려 더 쉬웠을 것이라고 말하는 것을 생각하면 금방 이해가 될 것이다.

지금 학교 현장에는 지속적인 대화와 관심을 필요로 하는 아이들이 너무 많고, 급속하게 늘어나고 있다. 게다가 공부 잘하고 모범적인 아이들까지도 학교에서 배울 것을 미리 학원에서 배우고 익히느라 지쳐 있기 때문에 그 눈빛을 살리는 일이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날마다 많은 선생님들은 이런 아이들과 부딪치면서 상처를 받고 있고,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날마다 이런 선생님들과 부대끼면서(?) 또한 상처를 받고 있다.


교육 현장 위기감 직시해야


우리의 교육 정책은 이 상처를 치료하는 것에서 출발하여야 한다. 구성원들 간의 건강한 관계의 회복이 무엇보다도 시급하다. 교육이 붕괴되고 있다고 하니까 사람들은 멀쩡하고 교육만 무너진 것으로 착각을 하고 있는지, 이명박 정부는 “지금까지 학생과 학부모들은 피나게 경쟁을 했는데 학교와 선생님들은 경쟁을 할 필요가 없었다”면서, 경쟁의 쌍칼을 휘두르라고 고삐를 죌 태세여서 교육 현장은 위기감조차 느끼고 있다.

치유, 그렇다. 이 지쳐 있는 학교현장을 향하여 경쟁을 강조하면 할수록 그것은 ‘폭력’ 그 자체가 될 수도 있다. 상처투성이로 신음하는 소리를 귀 기울여 들어야 할 때다. 우리 교육은 지금 종합적인 치료가 필요한 중환자이다.


2008. 4. 14(월) / <시민사회신문>에 게재